좋은 말씀/-목회단상

프로그램이 아닌 삶의 목회

새벽지기1 2016. 10. 1. 08:37


한국교회는 그동안 프로그램 중심의 목회를 해왔다.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 교회가 거의 없을 정도로 목회의 프로그램 의존도가 매우 높다. 그러다보니 프로그램이 많을수록 훌륭한 교회라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자리를 잡게 되었고, 목회자들은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회 프로그램 정보를 주고받는데 열을 올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교회의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목회자와 성도들도 적지 않다. 아마 한국교회 안에 유통되고 있는 프로그램을 모아보면 족히 수백 종류는 될 것이다. 유행처럼 이목을 집중시켰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프로그램도 많고,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처럼 쏟아지는 목회 프로그램을 배우고 따라하느라 정신이 없다. 연중 진행되는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는 건 물론이고, 배운 프로그램을 교회에 적용하느라 무진 애를 쓴다.

 

사실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프로그램이 없는 목회를 한다는 건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프로그램 목회를 지양한다. 아니, 거부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신앙이라는 것은 그 본성상 프로그램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지식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신앙이 지식과 도덕을 배격하지는 않지만, 지식과 도덕 체계가 신앙은 아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삶의 지향과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개인의 내면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관계, 더 나아가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처럼 이성과 도덕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심오한 것일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을 프로그램화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언어도단이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시라. 교육이나 훈련 프로그램이 전혀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앙교육과 훈련은 신앙성장에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교육을 프로그램화할 수는 없다. 아니, 프로그램화해서도 안 된다. 사실 신앙교육을 프로그램화하는 것보다 더 신앙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신앙을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신앙을 종교화하는 것이고, 교리와 도덕의 체계로 굴절시키는 것이다. 프로그램으로는 진정한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신앙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것으로써 신앙의 성숙을 대체해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폐해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신앙교육 프로그램의 가장 큰 폐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프로그램 중심 목회의 결과가 빈털터리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교회는 그동안 수많은 프로그램을 소비하느라 소중한 에너지를 쏟긴 했으나 얻은 건 별로 없다. 물론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약간의 영적 분별력과 신앙의 열심을 이끌어내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고의 프로그램을 이수했다는 자기만족과 영적인 우월감을 제공하는데도 적잖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진정한 내적 ‧ 영적 성숙을 도모하는 데는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건강하고 균형잡힌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세우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목회자와 성도 모두를 지치게 했다. 쉼 없이 생산되는 신종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쫓아가느라 과도하게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목회와 교회생활에 지친 목회자와 성도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프로그램 중심의 목회를 거부한다. 대신에 ‘삶의 목회’라는 길 없는 길을 가려 한다. 알다시피 신앙은 프로그램을 이수함으로써 얻는 열매가 아니다. 학원에서 지식을 전수하듯,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훈련하듯 신앙교육을 할 수는 없다. 신앙교육에는 왕도가 없다. 신앙교육의 커리큘럼도 중요하고 인지 교육도 필요하긴 하나, 아는 듯 모르는 듯 스며드는 것이 더 중요하고, 교회의 모든 것이 신앙교육의 장이 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교회의 모든 것은 신앙교육과 깊이 연결되어야 한다.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예배를 드리는 분위기,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태도,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것, 교회당 청소를 하는 것, 대화를 하는 것, 교회 행정을 처리하거나 회의를 하는 것 등등 교회의 살림살이 모두가 보이지 않는 신앙교육의 장이요 기회가 되어야 한다. 특히 각종 회의야말로 신앙교육의 훌륭한 장이자 기회가 되어야 하며, 헌금을 사용하고 보고하는 모든 과정 또한 신앙교육의 필수과정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생각해보자. 용서를 강의로 배울 수 있을까?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해서 용서를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배웠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용서를 배웠다고 할 수는 없다. 용서는 실제적인 상황에서만 배울 수 있다. 가령 성도 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 용서해야 할 일이 벌어졌을 때야말로 용서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막상 용서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면 성도들은 대부분 교회를 떠남으로써 용서를 배울 기회를 회피해버리고 만다.


용서뿐 아니다. 사랑, 기도, 절제, 평화, 오래 참음, 봉사, 헌신이 다 그렇다. 하나님나라에 속한 것은 삶을 통해 가르쳐야 하고, 삶으로 배워야 한다. 기획되지 않은 삶이야말로 최고의 교육이며 최고의 배움이다.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배움의 진실이다. 그런데 프로그램 중심의 목회를 하는 한국교회는 이 진실을 놓치고 있다. 프로그램 이식에 정신이 빠진 나머지 교회적 삶을 교육의 장으로 건사하지 못하고 있고, 삶으로 배우는 일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다.

 

하여, 나는 ‘프로그램 목회’ 대신 ‘삶의 목회’라는 길 없는 길을 가려 한다. 매 순간 매 상황마다 성령의 지혜를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며 나아가는 일이 중요할 뿐 공식화된 매뉴얼도 없고 확정된 프로그램도 없는 무모한 길 - ‘삶의 목회’라는 현대적이지 않은 길을 가려 한다. 이 길은 매뉴얼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정해진 길이 없기에 공허하고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이 없는 이 길을 기꺼이 가려 한다. 교회 안에 하나하나 신앙적인 삶을 녹여내면서, 그 삶을 통해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길 없는 길을 가려 한다. 설교와 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모든 프로그램을 거부하겠다는 게 아니다. 설교와 교육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교회의 중대사다. 프로그램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와 교육보다 더 근본적인 교육과정은 삶이라는 진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설교와 교육이 삶과 조우하고, 삶이 설교와 교육에 응대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목회라고 생각하기에 이 길을 가려 한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개입하심을 신뢰하고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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