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옥한흠목사

제자훈련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은혜와 소명, 은사를 점검하라

새벽지기1 2016. 8. 25. 07:11


한 영혼에 목회자의 모든 헌신과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제자훈련. 사실 사업으로 치면 손익계산이 안 맞는 장사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비록 그 사역이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큰 열매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모든 목회자가 마음같이 제자훈련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는 것은 아니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다. 그러면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 그 노하우를 제자훈련의 개척자인 옥한흠 목사에게서 한수 배워보도록 하자. <편집자 주>

1년에 네 번 열리는 CAL세미나에 참석한 목회자들의 눈빛은 항상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옥한흠 목사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제자훈련에 성공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이나 노하우를 알려줄지 궁금해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CAL세미나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나는 제자훈련의 세밀한 기술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강의가 끝나면,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이미 신학교에서 배웠어야 할 목회의 본질을 깨닫게 됐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털어놓는 것을 목격한다. 어떤 이는 40대, 어떤 이는 50대에 말이다. 저들이 제자훈련이 목회 본질임을 깨달아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감격이 교회 현장에서 꽃과 열매로 맺어져 성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CAL세미나 감격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인가?
제자훈련 사역은 어찌 보면 쉬울 수 있고, 어렵게 생각하면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다. 제자훈련의 열매를 맺고 있는 전국의 모델 교회 목회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제자훈련이 어렵기보다는 재미있다고, 제자훈련 없이는 자신의 목회가 완성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CAL세미나를 수료한 많은 목회자들은 제자훈련이 어렵다고 호소한다. 그래서 양육교재를 만들어 달라, 귀납적 인도법을 가르쳐 달라, 훈련 기간을 축소하면 안 되겠느냐고 문의한다.
하지만 제자훈련 사역의 성패는 정말 많은 부분이 누가 인도를 하느냐, 즉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수료자 중에는 제자훈련의 장벽을 만나 어려움에 빠진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제자훈련이 어렵다며, 포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아예 셀이나 D12 등 다른 방법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도 많다. 

 
제자훈련의 개척자로서 CAL세미나를 다녀간 목회자들이 모두 제자훈련에 성공적인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러나 실제 결과물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2006년 <디사이플> 12월호 설문조사 결과, CAL세미나 수료생 62.9%가 제자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CAL세미나를 마친 사람들 중 5년 후에도 제자훈련에 실패하지 않고, 자리매김하는 교회의 비율은 몇 %나 될까?
여기서 기간을 5년으로 잡은 것은 지역 교회에서 그쯤 돼야 열매도 좋고, 교회의 목회철학과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제자훈련에 대한 비전을 뜨겁게 펼쳐질 수 있는 장이 마련되거나, 모델 교회로서 영향도 끼칠 수 있으려면 최소한 5년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느냐 못 시켰느냐를 5년 단위 기준으로 본다면, 성공 확률은 10% 미만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10%는 대단한 수치라고 생각한다. CAL세미나 참석자 400명 중, 40명이 5년 후에 성공적인 제자훈련을 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재 D12나 셀 등은 최근 2, 3년 동안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제자훈련보다 쉬워서 그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다 씹어서 먹기 좋게 만들어 주는데 반해, 제자훈련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해산의 수고를 피하고, 제왕절개 수술부터 하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CAL세미나 이후 많은 수료생들이 제자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5년 이후까지 버티는 이들은 적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나는 제자훈련에 실패하는 이들이 던지는 변명과 이유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실패 원인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제자훈련 실패 사례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실패의 이유들을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제자훈련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디사이플>에서 시리즈로 다루기 원하며, 여기서는 원론적인 차원에서 목회자들이 제자훈련에 실패하는 원인에 대해 짚어 보고자 한다.

실패의 책임은 100%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
제자훈련의 성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이다. 제자훈련에서 목회자의 비중과 역할의 중요성은 에누리 없이 100%다. 제자훈련 실패의 책임은 100% 목회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반대로 제자훈련 성공의 책임도 100%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 이것은 절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제자훈련 실패의 책임을 단 1%도 평신도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제자훈련은 불가능해 보이는 대상을 가능성 있는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해산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대상을 눈앞에 놓고 훈련을 시작하는 사람이 그 실패의 책임을 평신도에게 1%라도 떠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훈련에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무조건 100% 목회자의 책임인 것이다. 이 점이 목회자들에게는 굉장한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제자훈련 시작 단계에서 또는 제자훈련을 하면서, 그리고 제자훈련 이후에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식 전달이 중심이 되는 성경공부는 좀 못 가르칠 수도 있고, 잘 가르칠 수도 있다. 반면, 제자훈련은 한 사람을 바꾸는 작업이다. 한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마치 아기를 열 달 품었다가 진통을 해서 낳은 산모의 고통과도 같이, 훈련 중에 목회자가 그런 해산의 고통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산모가 자기 배를 앓고 아기를 낳듯이 인도자도 그런 산고가 제자훈련 과정 중에 있어야 한다. 즉, 평신도의 영혼을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 바꾸는 과정에 있어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데 두는 사역이 바로 제자훈련이다. 그러니 사람의 이론으로 따지고 보면 불가능한 사역이다.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솔직히 자기 집안 식구도 그렇게 못하는데, 우리는 완전히 관계가 없는 제 3자를 데려다 놓고, 제자훈련을 한다. 그리고는 예수를 닮는 수준에까지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성숙과 헌신을 가르친다.
이것이 그 사람의 완전한 의식과 인격이 되고, 영적인 깊은 깨달음이 되도록 접근한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이, 목회자의 손에 제자훈련의 성패가 100%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자훈련 실패의 책임이 100%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원인을 한두 가지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단지 본질적으로 제자훈련 목회자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략 은혜와 소명, 사명감 등 세 가지 부분으로 좁혀 이야기할 수 있겠다.
첫 번째, 목회자는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영혼을 위해서 자신을 던질 만큼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 소명감이 있는가? 이것은 제자훈련과 관계가 없이,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체크해야 될 부분이다. 목회자가 얼마나 은혜를 아는 사람이냐, 얼마나 소명을 가진 사람이냐, 이 두 가지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 둘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 목회자의 정맥과 동맥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피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 생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은혜와 소명은 심장에서 피가 들고 나가게 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나는 제자훈련에 실패하는 이유 중, 이 부분에서 걸리는 목회자들이 꽤 많다고 본다. 본인이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니까, 은혜로운 제자훈련이 불가능한 것이다. 성경공부는 하는데, 정말 복음 앞에서 감격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변화되었는지를 묻고 싶다. 주님께 헌신하고, 복음의 은혜를 아는 목회자가 하는 제자훈련과, 은혜의 경험이 없는 목회자가 하는 제자훈련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목회자의 세계는 은혜가 점점 메말라 간다. 물론 간혹 어떤 목회자는 멋도 모르고 제자훈련이 좋아서 하다가 오히려 은혜 받는 사람도 있다. 처음 출발부터 은혜를 알고 제자훈련을 선포할 수도 있지만, 순전한 마음으로 제자훈련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은혜 받고 평신도와 함께 변화가 되어, 제자훈련 사역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사람도 있다.
모든 제자훈련 사례가 이렇게만 된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목회자는 어떤 형식으로든 먼저 은혜를 받아야 된다. 제자훈련은 목회자가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인도해야지, 서푼 입을 가지고 제자훈련을 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은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있다.
은혜가 메마른 제자훈련은 결국은 하나의 형식이 되고, 메마른 성경공부가 되니까 열매가 없다. 열매가 없으면 쉽게 포기하게 되며, 결국에는 다른 방법에 기웃거리게 된다. 이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은혜 받은 사역자가 될 수 있느냐’ 이 점을 먼저 고민하는 것이 제자훈련을 위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목회자들을 보면 생각보다 기도를 안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직접 은혜 받는 노력이 너무 부족하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가도 교인들을 섬기다 보면 정작 자신은 잠깐 앉아서 기도 몇 마디하고 끝나 버려 기도할 시간이 없다.
참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담아 그 뜨거운 가슴 때문에 영혼을 사랑하게 되고, 제자훈련 하면서 자신이 그 은혜 앞에 녹아지는 뭔가가 목회자들에게 있어야 된다. 은혜가 메마른 자리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것은 비 안 오는 땅에 묘목을 심는 것과 같다.
자신이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본인 스스로 체크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묵상한다든지, 틈틈이 앉아서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렇게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됐는지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깊은 감동으로 젖어드는 마음이 있다든지, 성경을 읽다가 어떤 말씀에 붙들려 시간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든지 등 스스로 알 수가 있고, 부족한 부분을 체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없고, 가슴이 냉랭하면 그 목회자는 은혜가 없는 것이다. 은혜가 없는 사람은 가슴이 썰렁하다. 썰렁하기 때문에 남 앞에서는 더 요란한 쇼를 하고, 제스처를 쓰게 된다.
제자훈련에 성공한 교회들을 보면, 목회자들이 은혜가 충만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은혜 받은 경험이 있고, 그 은혜를 남에게 전하는 데 좀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은혜는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은혜를 유지하고, 그 은혜에 머물게 되며, 은혜를 계속 가꾸는 작업이 중요하다. 교회 사역이 점점 목회자들을 바빠지게 만들고, 제자훈련의 경우 똑같은 일을 매년 반복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러니 목회자는 은혜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한다.

은혜 유지하기 1 | 설교 준비하며 은혜에 젖어라
개인적으로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제자훈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설교준비였다. 감사한 일은 내가 설교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 앞에 감격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를 정말 은혜의 도가니로 집어넣을 수 있는 감동적인 설교자를 아직까지 못 만났다는 점이다.
과거 신학교를 다니기 전이나 신학교를 다닐 때는 나를 감동시키고, 은혜를 다시 한 번 가슴에 담을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해 주는 설교자들이 내 주변에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의 설교를 들으면 식었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고, 내 자신이 다시 한 번 십자가 앞에 다가가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계신 주님과의 교제를 체험했다.
그러나 내가 목회자가 되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고부터는 감동적인 설교자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가장 큰 불행이었고, 고통이었다. 설교 테이프도 많이 사서 들어보고 TV를 통해서도 들어보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큼 은혜를 끼치는 설교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고통을 메우기 시작한 것은 설교 준비를 하면서부터였다. 그만큼 설교 준비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살아야 했다. 사랑의교회를 은퇴하기 전에는 제자훈련반에 들어가 평신도들을 앉혀 놓고 훈련시키다가, 나 자신이 은혜를 받을 때가 많았다. 내가 은혜 받는 것 때문에 평신도들도 역시 함께 은혜를 받았다.
이런 은혜의 선순환이 이어지니까 목회자인 나도 살고, 평신도도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제자훈련 사역을 부교역자들에게 다 넘겨주면서부터 나에겐 엄청난 도전과 위기가 찾아 왔다. 그래서 더욱더 설교 준비에 몰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교 준비에 몰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선배들의 설교나 글, 주석 등을 많이 접하면서 말씀을 깨닫는 은혜의 세계로 내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목회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목회자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큰 특권을 누렸겠는가?


그런데 요즘같이 설교를 가볍고 쉽게 준비하고, 적당히 짜깁기해서 설교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목회자의 영성이 점점 메말라 가는 것이다. 요즘 말로는 영성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그것을 은혜라고 본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바쁜 사역을 이유로 은혜를 소홀히 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주일설교, 저녁설교, 새벽설교, 수요예배 설교 등 목회자가 해야 할 설교가 많다 보니, 설교가 은혜의 샘물을 찾아가는 길이 되기보다는 짐으로 다가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적으로 잘 처리하면 된다.
예를 들면 주일설교는 어차피 준비를 철저히 해야 되니 차지하고라도, 새벽기도는 본문을 시리즈로 다 설교 준비하기보다, 읽으면서 느낀 것과 깨달은 것을 가볍고 간단하게 전하면 된다. 또 수요예배 설교는 강해설교 하나를 선택하고 꾸준히 시리즈로 설교하면, 목회자도 배우고 평신도들도 배우면서 은혜에 젖게 된다.
이렇게 설교를 차별화시켜 준비하면, 절대 시간에 쫓겨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심방 시에도 그때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지고 들어가면 된다. 그걸 놓고 한 시간씩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될 이유는 없잖은가.
그리고 부교역자를 세워 설교의 기회를 자주 주면 목회자 자신의 리듬이 깨지지 않고, 설교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잘 유지할 수 있다. 바쁜 목회자에게는 이 리듬을 쭉 이어가는 사역의 지혜로운 선택과 선택된 사역에 대한 집중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은혜 유지하기 2 | 가정예배 등 개인 노력이 필요하다
간혹 후배 목회자들이 어떻게 말씀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 문의하는데, 그것은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게 아니다. 배고프면 자기 스스로 먹어야 한다. 자신이 찾아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직접 먹어야 한다. 남이 국을 안 끓여 주면 자기가 끓여서 먹어야 된다. 목회자는 누구한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가끔 목회자의 바쁜 라이프스타일이 문제가 된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문화 변혁을 통해 찾아오는 시대적 도전일 뿐이다. 자기를 지켜야지,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 2천 년 전 우리의 위대한 신앙 선배들이 시작했던 그 영적인 세계를 지금도 유지하는 게 우리의 과제다. 2천 년 전의 은혜와 사역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가르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라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거기에 무슨 21세기가 있고, 20세기가 있는가? 근본적인 자세가 바로 안 되어 있으면, 받은 은혜도 쏟아 버리고는 어렵다고 하소연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은퇴를 했기 때문에 설교할 기회가 별로 없고, 과거처럼 설교 준비하며 은혜를 체험할 기회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내와 함께 날마다 가정예배를 드린다. 이 가정예배가 나의 은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아내를 앉혀 놓고 같이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드린다. 주로 내가 기도를 인도하는데, 혼자서는 힘없이 그냥 몇 마디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앞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 영적 긴장감을 주고, 그 긴장감은 내가 힘을 쏟고 집중해서 기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은혜 유지하기 3 | 좋은 책, 설교들을 자주 접하라
그 다음으로 나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좋은 책들을 선별해서 정독하는 것이다. 목회자이니까 기본적으로 매일 성경을 어느 정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다. 요즘은 참 좋은 세상이다. 제자훈련을 하기 원하는 목회자에게 양질의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좋은 책들이 너무나 많다.
정말 어떤 책은 그 한 권만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면, 다른 책은 안 읽어도 될 만큼 깊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부지런해져야 한다. 교회 바깥에 나가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특히 설교자는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깊이가 결정된다. 시간 투자를 해서 읽어도 후회가 없는 책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나는 정독하는 스타일인데, 가벼운 책들은 그냥 차에 가면서 슬쩍 보고 끝낸다. 옛날 신학교 다닐 때나 목회자가 갓 되었을 때는 원서를 일부러 사 보지 않는 이상 정말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그런데 그 원서를 읽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요즘에는 번역서들이 워낙 잘 나온다.
C.S. 루이스의 책이나 달라스 윌라드, 오스 기니스, 데이비스 웰슨, 찰스 스펄전,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필립 샤프, 존 칼빈, 필립 얀시, 맥스 루케이도, 찰스 콜슨, 헨리 나우엔 등 신선한 인사이트를 불러일으키는 저자의 책들이 너무나 많다.
그 다음 내가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과거에 했던 설교들을 다시 한 번 리뷰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는 지금 들어도 파워풀하다. 과거에 철저한 준비 끝에 했던 설교 가운데 나를 감동시키는 설교를 다시 들으면서 나는 그때의 은혜를 회생한다. 그 다음에는 TV나 테이프를 통해서 내가 은혜 받고 싶은 사람의 설교를 듣는다. 내가 은혜를 받기 위해 듣는 것이니까 신중히 선별해서 경청하는 편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목회자는 자신만의 은혜의 비밀을 지키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훈련 성공의 키다. 자기만 아는 은혜의 비밀이 없이는 절대로 제자훈련에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CAL세미나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목회자라면 자신의 영적 은혜가 마르지 않도록 자신만의 비밀 무기들을 계속 계발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소명을 지녀야 한다
두 번째, 목회자는 소명이 있어야 한다. 소명은 지도자가 양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소명은 주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는 결단이다.
그 소명을 가진 사람은 한 영혼을 놓고도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열정을 가질 것이고, 소명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면 십중팔구는 제자훈련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제자훈련을 통해 사람들이 변화되고 있는가? 은혜의 파고(波高)가 밀려오는 흥분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그 목회자는 소명을 받은 목회자라고 확신한다. 소명은 은혜를 담아 나르는 그릇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명에 대해 궁금하다면, 오스 기니스의 『소명』을 여러 번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해 기술한 책 중 이만한 책이 없다.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와 닿았던 점은 월버포스가 25세 때 회심 후 갖게 된 소명이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20대에 영국 의회에 정치인으로 입문할 정도로 미래가 탄탄대로였다. 그러던 그가 회심 후 영적인 일이 세상적인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성직자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존 뉴턴 목사에게 “주님께서 당신은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세우셨다”라는 설득을 당한 후, 정치인으로 남게 된다. 그는 세상에서 정치인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했는데, 그것은 그가 27세 때 영국 의회에 노예매매 폐지안을 제출한 것이다. 그는 그후 생명의 위협과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55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노예매매 폐지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에 응답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와 헌신, 열정을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투자한 것을 이른다. 월버포스는 주님의 소명에 100% 응답하는 삶을 산 것이다.
내가 오스 기니스의 『소명』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목회자의 소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은 근본적인 소명이 무엇이냐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회자가 훈련을 시키는 제자들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먼저 깨닫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왜 제자훈련을 받아서 주님 앞에 충성해야 되는지,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다는 것을 목회자가 깨닫기를 바라는 측면에서 추천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신학적, 성경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여, 깊은 확신을 가진 목회자는 평신도를 지도하는 자세가 그만큼 다를 것이다.
평신도에게도 성직자와 다름없는 놀라운 소명이 주어졌는데, 목회자인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를 반대급부로 적용해 자신의 소명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소명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제자훈련 하는 자세도 달라지고, 평신도를 대하는 자세도 달라진다.
그런데 막연히 우리는 ‘소명’ 하면 신학교에 갔느냐, 안 갔느냐를 두고 말하기에 『소명』을 읽으라고 추천하는 것이다. 평신도도 ‘소명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평신도를 데리고 씨름하려고 안 한다. 씨름을 해도 참다운 제자상과는 거리가 먼 제자훈련을 하게 된다. 평신도도 목회자도 다 같은 소명자라는 생각이 없으면, 제자훈련의 목표나 제자상이 달라진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목회자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
세 번째, 목회자에게는 은사가 필요하다. 은사가 있는 사람이 지도하는 제자훈련과 은사가 없거나 부족한 사람이 지도하는 제자훈련은 참 많이 다르다. 제자훈련에 은사가 없는 사람이 지도하는 제자반은 지루하다.
이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병든 그룹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제자훈련 모임을 사랑하고 기다리며, 참석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이는 분위기라면 그 지도자는 은사를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여러 달이 지나도 모이기를 싫어하고, 전화를 해서 강제 동원하다시피 하는 제자반이라면 목회자의 은사부분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간혹 목회자 본인은 열정이 뜨거운데, 은사가 부족해서 훈련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그 해결 방법을 묻기도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목회자로서 설교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가 부족한 것을 미리 알았다면 목회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는 이미 목회의 길에 들어선 후에 이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본인은 물론 교인들도 고생한다.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 하며’(딤전 3:2)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사전에 자신의 은사를 미리 체크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너무 소홀한 것 같다.
다른 목회와 달리, 제자훈련만큼 목회자가 갖고 있는 은사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드물다. 만약 어떤 목회자가 열정과 은혜의 경험도 있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태도도 있는데, 정말 가르치는 은사가 부족하다면 자기 적성에 맞는 사역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이 엄청난 경쟁구도 속에서는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해 놓고, 얼마 안 돼서 문을 닫아야 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분당 지역 같은 경우 몇 십 개 교회가 문을 닫는 이유도 바로 목회자의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은사 점검은 어렵지 않다. 주일학교나 구역 담당을 하면서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교회 사역을 통해서 확인받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자주 있다. 은사가 부족하니 목회가 풀리지 않게 되고, 자꾸 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좀 더 패키지화된 목회를 해보려 하고, 여기저기 세미나만 기웃거리는 초라한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럼 은사를 개발할 수는 없을까? 있다고 본다. 신학생들 중 한 10%는 개발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90%는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따라 목회도 제자훈련도 잘 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은사는 유무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만큼 개발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어떤 목회환경에서 배웠느냐, 어떤 목회 경험을 많이 했느냐, 어떤 선배 목회자나 어떤 교단 밑에 있었느냐에 따라 많이 좌우될 수 있다.
그러면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로서 은사 개발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자훈련을 잘 하는 목회자 밑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게 제일 빠른 첩경이다. 제자훈련을 잘 하는 목회자 밑에서 5년 이상 있으면서 제자훈련의 경험을 쌓고, 좋은 열매 맺는 축복을 누린 목회자라면 보슬비에 옷 젖듯이 가르치는 은사가 개발되거나 발전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현재 제자훈련 모델 교회나 제자훈련에 성공한 목회자들 중에는, 제자훈련을 잘 하는 교회 담임목회자 밑에서 사역한 부교역자 출신들이 많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국제제자훈련원의 프로그램을 통해 제자훈련을 정착시키는 비율보다 이미 성공한 동역자들 밑에서 배운 부교역자 출신들의 성공률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본다. 얼마만 있으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국제제자훈련원의 사역이 직접 간접적으로 본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평가해 본다.
이번에 <디사이플>에서 제자훈련 실패 시리즈를 기획하는 목적은 제자훈련을 하려는 목회자들의 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솔직히 시인하고, 열심히 배워서 자기 개발에 성공하도록 돕는데 있다. 그러면 지금의 제자훈련 성공률을 10%에서 30%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제자훈련의 성패 기간 최소한 5년은 잡아라
제자훈련은 첫술부터 절대 배부를 수가 없다.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기간을 최소한 5년을 잡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 제자훈련을 시작할 때는 은혜 없이 시작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제자훈련을 하다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가 몰랐던 제자훈련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연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실패와 연단의 과정을 겪으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개인적 바람은 그런 사람들이 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제자훈련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열이면 열 넘어지기 쉽다. 누구도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실패를 전혀 안 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심각한 실수를 해서 제자훈련의 판이 깨지는 것 같은 위기를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나중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고 새롭게 출발하게 하는 하나의 변장된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자훈련을 하려는 목회자들에게 적어도 최소한 5년 이상을 해보고 나서, 실패냐 아니냐를 이야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5년 이상은 제자훈련을 해보고, 내가 은혜 있는 사람인가, 소명 있는 사람인가,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평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이 없이 몇 번 해보고서 함부로 자신을 속단해서도 안 되고, 제자훈련에 대해 평가절하해서도 안 된다. 산모가 임신을 했으면 9개월, 10개월간은 씨름을 해야 되잖나. 그런 과정을 무시해 버리고 제자훈련의 성패를 논하는 것은 열 달이 차기 전에 애를 잘 낳을 것이냐 못 나을 것이냐를 두고 씨름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제자훈련의 실패를 이야기할 때는 적어도 개 교회에서 5년은 열심히 한 우물을 파라고 주문하고 싶다. 일단 5년간은 목회자가 제자훈련에 전력투구한 후, 그 결과를 놓고 냉정하게 판단해서 계속 노력하거나 은사를 개발하면 될 일인지, 아예 근본적으로 ‘나는 안 될 것이다’라고 속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요즘 목회자들은 조급하다. 5년까지 제자훈련을 해보고 성패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조급한 편이다. 1~2년을 견디는 것이 고작이다. 이것이 제자훈련을 정착시키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본다. 다시 한 번 말하면, 5년 안에는 제자훈련이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 따지지 말고, 목회자의 모든 것을 올인 해 볼 것을 권한다. 그 후에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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