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로마서 9장 특히 17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이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곧 사람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격하된 듯 보인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불의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불의할 수 있다면 누가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만약 논쟁의 최고점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무가치한 것을 말하였다면, 그것은 단지 괄호 안에 넣어서 지적한 것이다. 이스라엘을 물리친 하나님의 뜻은 이후에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때까지 임시적일 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이르게 한 것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역사의 끝에 이루실 것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을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거역할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두말 할 것 없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 외에 하나님에게 거역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사람은 하나님께 거역할 어떠한 권리도 허용되지 않지만 그가 가진 존엄성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을 받고 다른 사람과 다른 주장을 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장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사람은 다른 인류의 구성원과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로 대우 받아야 한다. 기독교 진리는 사람이 가진 이러한 보편적 존엄성과 가치를 가르친다.
사람이 가진 존엄성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하는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에 의존한다. 이러한 사랑은 삼위 하나님이 영원토록 서로에게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영원하신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러한 자기희생의 사랑이 사람의 존재 기원이다. 이 사랑은 사람에게 은혜와 죄 용서함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잊고 그 대상이 가치가 있거나 없거나를 가리지 않고 값없이 베푸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살고 십자가에서 죽으며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며 성령의 선물로 표시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셨고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맡기신 모든 사람을 그들이 가진 가치를 따지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둘째, 지음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존엄성을 갖는다. 그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죄인이든지 성인이든지 가리지 않는다. 그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인격성을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인격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사람이 누구나 갖고 있는 존엄성을 마땅히 선하고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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