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새 포도주, 새 부대 (마 9:14-17)

새벽지기1 2016. 7. 13. 07:36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는가“ 하고 묻는, 요한의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나왔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설명을 한 뒤였다.

바리새인들은 신랑과 관계없이 관례에 따라 형식적으로 금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과 관계가 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기뻐한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고 나면 그 신랑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금식한다고 하셨다.


새 포도주는 신랑과의 관계가 우선이다.

헌 포도주는 신랑과의 관계는 상관이 없고 내 종교의식과 내 의로운 행위가 우선이다.

새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주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헌 포도주는 시내산에서 율법의 행위로 세우는 옛 언약이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이다.

구약의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만든 유대인들의 종교인 헌 부대에 넣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학자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헌 부대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세운, 종교제도와 종교권력의, 기득권의 헌 부대에는, 담을 수가 없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린 새 언약의 피를 그 헌 부대에는 담을 수가 없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의 세력들은 새 포도주를 십자가에서 흘리게 할 뿐이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인하여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다.

그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다.

(눅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것은 옛 언약을 통해 내내 말씀해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볼 수가 없었다.

옛 언약은 주님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는데도 그들은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 줄 알았다.

(눅 24:44)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아브라함의 한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재물과 권력과 쾌락에 눈이 가려 볼 수가 없었다.

(창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다고 했다.

원수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천하 만민이 구원의 복을 누린다는 말씀이다.

헌 포도주와 헌 부대에 가로막혀 그들은 이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복음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이들이 천하 만민의 복을 가져오는 아브라함의 씨를

그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고 새 포도주의 피를 흘리는 일에 기여하였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비극이고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는 비극적인 교훈이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가장 대적하는 원수가 되고 만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싫어한다.

새 포도주,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은 무엇인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복음을 말한다.

그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옛 언약은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려고 하고 구원을 받을려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을려고 하였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아는데 2천년이 걸렸고 학습기간이 그렇게 길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가 없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율법은 구원을 위한 의가 아니라, 참의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가정교사였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여전히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의 행위로, 자신들을 구원할려고 피나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이미 끝난 시험인데도, 아직도 그 시험의 합격을 위해 분투노력하고 있다.

수건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단이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게 가렸기 때문이다.

(고후 3:14-18)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4:4,6)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조나안 에드워즈, “신적이며 영적인 빛)


의롭다함을 받아야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경건하고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신 그분을, 마음 속에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 의로움을 영원히 선언하시는 것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롬 5: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새 포도주이다.

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새 포도주도 살고 새 부대도 살 것이다.

그분의 피로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의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새해가 되시기를, 남은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로마서 5장은 세 가지로 말씀해 준다.

(롬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1.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새 부대로 살아야 한다.

내 마음에 평화와 안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가 그분의 피로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 마음에 혁명적인 변화가 와야 한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마음에 평화와 안식을 얻고, 1200년 묵은 거대한 여우, 로마 카톨릭과 싸울 용기를 얻었다.

그는 그동안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따라 고행과 선행으로 의로워질려고 죽을 고생을 했다.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피로,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임을 알고는,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알고는, 이제 내가 받으면 되는 것임을 알고는

모든 종교적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그 해방과 자유를 모든 믿는 자에게 주기 위해 몸을 던졌다.

그것이 1200년만의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혁명으로 번졌다.


그 결과 우리 손에 우리 말로 번역된 우리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손에 있는 것이다.

카톨릭은 이 성경을 보지 못하게 하여 민중을 우매하게 하였고 우매한 민중을 쉽게 종교권력으로 다스리고자 하였고,

그래서 종교를 미신으로 의식으로 흐르게 하였다.

루터가 먼저 한 일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들려주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때 내 마음에 평화가 있고 그 평화로부터 진정한 용기가 나온다.

용기는 의로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없다고 의지가 약하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 마음에 평화가 없음을 한탄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온다. 진정한 용기가 나온다.

불안하고 짜증나고 살 맛이 안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형식적인 관계 말고,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살아있는 관계 말이다.

내 불안과 짜증과 우울은, 환경 탓도 아니고 원수 탓도 아니다.

내 마음에 그분이 살아계시질 않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다른 것에 쏟고 있는 것이다.

원수에게 환경에게 시비를 걸고 뜯어 고칠려고 하고 못마땅해 하는 동안에는 평화가 없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게 하시라.

그 따스한 빛에 굳어지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라.

우리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행위를 고쳐서 의롭게 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달으라

오직 그분이 내 마음에 계심으로만, 그분이 주시는 평화로만,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음을 믿으라.

내가 그분의 품으로, 그분을 내 마음의 중앙에 모시라.

그분이 주시는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그분의 평안으로 새 부대롤 삼고

새 포도주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자.


2. 은혜의 새 부대로 살아야 한다.

그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우리는 그 은혜로 살아야 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은혜의 반대는 율법이다.

은혜가 왕노릇해야지 율법이 왕노릇하지 않게 해야 한다.

율법은 행위를 대표한다. 은혜는 성품을 대표한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행위와 업적을 자랑한다.

은혜로 의로워진 사람은 자기의 성품과 죄인됨을 부끄러워한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한다.

남을 그 율법으로 정죄하고 자기가 그와 같지 않음을 기도하면서도 자랑한다.

(눅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구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한 세리였다.

율법은 자기를 높이게 되고 그렇지 못한 남을 깔보고 무시한다.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여서 그걸 뺄려고 한다.

은혜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보기 전에 나의 죄임됨을 보고 부끄러워 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안 보이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가 보이고 그걸 뺄려고 한다.

은혜가 사람을 바꾸지 율법이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율법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이루는 것도 은혜이지 의로운 행위가 아니다.

의로운 아버지보다도 은혜의 어머니가 자녀를 좋은 성품으로 기른다.

법은 마음에 있어야 지켜질 수 있다.

내 마음에 법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법을 새길 수 없다.

아무리 매질을 해도 법은 마음에 새겨지지 않고 순간만 모면할려고 할 뿐이다.

법 개념이 없고 무개념의 사람을 만들고 만다.


새 언약의 시대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판에 새겨서 지키게 하는 시대이다.

옛 언약의 시대는 먹으로 돌(머리)판에 새겨서 지킬려고 하는 시대였다.

새 포도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복음 진리를, 은혜의 그릇에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은혜를 보여주어야지 법을 보여주어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없다.

모든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 다 이루었다고 했다.

(갈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새 부대로 살아야 한다.

내 욕심 내 야망을 바라고 즐거워해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그 의로움을 하나님의 영광에 드려야 한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욕심은 죄를 낳고 사망을 낳고 만다.

내가 욕심을 내고 그 목표를 향해 달음박질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잘난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새 포도주이신 그분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에 내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 영광을 새 부대로 삼아야 한다.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 때

그분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낌없는 축복을 해주신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됨을 통하여 그분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분을 겸손하게 경외하면 그분은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보상해 주신다.

순서가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