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직구를 던지는 여 전사
우리 교회에 목사인 나에게 자주 돌 직구를 던지는 용감무쌍한 여 전사(여집사)가 있다. 오후 소그룹 모임에서 오전 예배 설교를 나누는데 대번에 내 설교를 까고 들어간다. 오늘 목사님 설교는 너무 어려웠고 뜬 구름 잡는 얘기 같았다는 것이다. 그 집사는 항상 그런 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시원스럽게 내 뱉는 스타일이지만 악의나 뒤끝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솔직함이 모임에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교인들이 매 주 들은 설교를 나누지만 파괴적인 비판으로 흐르거나 목사가 설교하기에 부담이 되게 한 적이 없었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오후 소모임에서 들은 설교를 나눈 후 내 책,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열굴”을 한 장 씩 읽고 토론한다. 이미 마지막 장까지 끝냈고 다음 주에는 부록을 다룰 차례가 되었다. 그 여 전사가 내가 부록에서 비판한 정용섭 목사의 견해가 자기에게는 너무 마음에 들고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정 목사가 자주 “세상과 인간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안달하지 말고 제발 그대로 두라”고 말하는 저변에 깔린 신학적인 복선이 무엇인지를 내 책에서 논했는데, 자기는 오히려 정 목사의 주장이 마음에 쏙 든다는 것이다. 변화되어야 한다는 부담과 강박에서 자유하게 해주니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변화를 지겹도록 강조하는 내 설교는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는 반의적인 표현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전혀 언짢지가 않고 오히려 공감을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변화되지 않는 자신과 교인들을 보면서 내 마음 한 켠에도 변화되어야 하는 당위와 변화되지 않는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한 끊임없는 고뇌와 갈등의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픈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인들이 목사의 가르침에 삐딱하게 반기를 들더라도 진솔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드러내 주니 감사한 일이다. 그런 자신들에게 내가 다시 돌직구로 보복할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렇게 밀고 당기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가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간다.
돌 직구를 던지는 여 전사(2탄)
나에게 돌 직구를 던지는 여 전사(집사)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는 분들이 있어 제 2탄을 올립니다.
이번 주일 오후 소모임에서는 내 책 부록에서 정용섭 설교비평을 비평한 부분을 가지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목사가 교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정 목사의 주장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다. 그 여 집사는 목사님이 획가닥 변하면 교인들에게 변하라고 핏대를 올리지 않아도 교인들이 그 달라진 모습을 보고 감화를 받아 변한다는 것이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모두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내가 또 한방 먹은 셈이다. 나도 질세라 즉각 응수하였다. “내가 확 변해버리면 교인들이 더 힘들어질 수 있어, 당신들도 나처럼 은혜를 받으면 확 변하는데 왜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변하지 않느냐고 교인들을 은연중에 다그칠 수 있지. 내가 잘 변하지 않으니 성숙이 더딘 교인들을 이해하게 되고 겸손히 그들을 기다려주게 되는 거지.” 임기웅변으로 그 여 전사에게 통쾌하게 복수해주었다.
그러나 사실 그 여 전사가 던진 돌 직구가 정곡을 꿰뚫은 것이다. 변화된 설교자의 아름다운 인격과 삶 자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성화의 메시지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청년시절 알던 어떤 목사님은 주님을 느끼게 할 정도로 거룩하고 은혜가 충만한 분이었지만 이론적으로는 성화론에 대해 잘 몰랐고 잘 가르치지도 못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설교가 아니라 그 분 자체가 사람들에게 성화에 대한 향수와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 목사님은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하셨지만 내 안에 그를 닮고 싶은 갈망은 아직 꺼지지 않고 남아있다. 성화론을 전공한 나는 이론적으로는 성화에 대해 유창하게 설파할 수 있을지 모른다. 듣는 이들에게 마치 내가 말하는 성화의 실체를 소유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부재한 이론으로는 그 목사님처럼 교인들 안에 강렬한 변화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그 여 전사가 말한 극적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얼마나 추구해왔는지 모른다. 지난 30년간 나의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는 성화의 문제였다.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성화의 고민과 숙제를 풀기 위해 교회 역사 속에 거의 모든 성화에 대한 이론과 경건서적을 섭렵했고 성화의 특이한 비결을 제시한다는 가르침이라면 모조리 찾아 탐독했으며 그 비결이 진짜 통하는가를 실제 자신에게 적용하고 시험해보았다. 칼빈주의 전통은 물론이고, 존 웨슬리와 성결운동의 가르침, 더 높고 깊은 삶(the higher, deeper life movement), 케직 성화론, 오순절 성화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까지 그들의 가르침과 지침을 충실하게 따라 극적 변화의 은혜(즉각적인 성화, 제 2의 축복, 자아가 죽은 체험, 성령세례, 성령 충만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지칭됨)를 오랫동안 간절히 추구하였다. 이런 은혜를 애타게 구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놀랍게 주어졌다는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가 나에게만은 항상 빗겨갔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은 사실은 우리가 변화되는 방식과 패턴은 매우 다양하기에 단순한 구도로 획일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극적 성화의 은혜를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그런 식으로 변화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영적인 조급증 때문에 성화의 느린 과정을 견디지 못해하며, 한방에 우리의 모든 영적인 질병과 문제를 날려버리고 단숨에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영적인 특효약을 원한다. 어떤 이가 말했듯이 그런 빠른 해결책을 찾는 것 자체가 영적 질병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성화의 단순한 비밀은 없다. 우리 각자의 체질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맞춤형 성화의 방식으로 우리를 연단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성화는 아주 길고 지난한 과정 속에서 온갖 고난과 슬픔과 실패와 좌절의 질곡을 거치며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떤 비밀, 어떤 신비체험도 그 과정을 하룻밤사이에 끝내게 할 수 없다.
나의 경우는 성령을 온전히 따르기보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방황하느라 성화의 진전이 무척이나 더디게 이루어진 성화의 실패 케이스인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잘 변하지 않는 완고한 자를 오래 참고 기다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가면서 쉽게 변하지 않는 교인들을 좀 더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며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 성화의 실패가 가져다준 역설적인 유익, 은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좀 더 젊어서 열렬하게 추구했던 극적인 변화의 체험을 했다면 도무지 변하지 않는 교인들을 과연 오래 참아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물론 이것이 성화의 부진함에 대한 옹색한 변명과 자기합리화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박영돈 목사의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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