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칼빈은 행여나 후대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할까 심히 두려워하며 자신이 철저히 잊히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런 칼빈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이들은 얼마나, 자신들이 잊힐까 두려워하며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으로 부풀어있는 가벼운 위인들인가. 칼빈의 신학까지 자신의 잘남과 학식을 뽐내는 도구로 삼는 유치함의 극치를 드러내니 말이다. 칼빈의 신학적인 유산을 전수하는 것은 귀한 일이나 칼빈을 거의 준 우상 수준으로 추종하는 행태는 칼빈이 가장 우려했던 바이며 칼빈에 대한 모독이다. 칼빈이 그의 후예들에게 진정으로 원했던 바는 그의 어깨를 밟고 일어서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주의자의 첫 번째 특징은 자신의 탁월하고 잘난 것을 감추는 것이다. 개혁주의 모토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가장 훼손할 수 있는 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은사를 부여받은 자들이다. 이런 이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탁월함에 매료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쳐가며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교묘하게 가로챌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이런 일은 자연 발생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앞에 나타나는 인간의 탁월함에 더 도취되는 미숙한 교인들에게는 인간숭배로 치우치는 강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차원적인 경건의 꼼수로 사람들을 자신에게 열광하는 팬으로 만들 수 있다. 자신의 탁월함을 은근히 드러내, 사람들이 경탄하게 하고는, 그들이 찬사를 보내면 다시 겸양의 극치를 보이는 경건의 쇼맨십으로 더 큰 찬미를 유도해낸다. 자기선전에 능할수록 출세하는 이 세대의 풍조에 약삭빠르게 잘 편승하는 이가 교계에서도 유명세를 얻는데 성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탁월한 사역자들은 극히 조심해야한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탁월한 은사를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훔쳐가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은 마귀적인 죄악이다. 이런 짓을 가장 교묘하면서도 영특하게 잘 하는 자들이 남다른 탁월함을 가진 목사나 신학교수들이다. 그래서 종교적인 스타가 된 특정한 목사들에게 교인들이 떼거지로 몰려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 나라보다는 목사 중심의 종교왕국에 더 가까운 기형적인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대형화 문제 저변에 깔려있는 심층적인 원인 중에 하나가 뛰어난 사역자들이 자신의 카리스마와 탁월함이 하나님 숭배보다 목사추종이라는 우상숭배를 유발하지 않도록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숨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교인들에게 자신의 이미지와 특성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간 사역자는 주님을 높인 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은밀히 자신에게 끈 자이다. 죽은 후에까지 추종자를 거느리는 자는 주님의 영광을 훔친 최악의 사역을 한 자이다. 비록 사람들이 추종하는 것을 자신이 원치 않았을지라도, 교인들이 자신은 잊고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진정한 종의 역할을 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다.
참된 사역자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충실한 싸인 역할을 하고 자신은 철저히 잊히게 하는 사람이다.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때 젖떼기를 해야 하듯이, 자신을 지나치게 바라보고 의존하는 어린 영혼들의 젖떼기를 과감히 시행하지 않으면 그들을 영원히 인간을 추종하는 영적 미숙아로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탁월할수록 그것이 지식이든, 경건과 영성이든, 개혁정신이든 무엇이든지 자신의 잘남을 좀 감추어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못남과 약함과 치부를 자랑하듯이 드러내야한다. 자신에 대한 칭송을 더 유도하기 위한 간지러운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인기가 금가게 하는 치명적인 못남을 드러내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교인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추종하지 않도록 찌그러져야한다. 사람들이 좀 망가지고 찌그러진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용기가 없으면 자기선전의 자랑 질이라도 하지 말자. 이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매일 권면하는 말이다.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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