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후면,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지 500년이 된다.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목소리는 49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특히 루터의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적 모습이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그런데도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중 어느 교회가 더 개혁이 필요한 교회라고 보느냐는 설문 조사를 한다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시사 주간지 <시사IN>의 2012년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회의 신뢰도(26.4%)는 가톨릭(57.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미 십수 년 전부터 기독교인들을 개독교라고 하고 잡상인, 해충이라 한다니 참으로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타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개혁의 전통이 잘못된 것인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 오류인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이러한 구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은 충분히 성경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정신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순히 500년 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부심만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종교개혁 정신의 핵심은 지상의 교회는 부단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신앙 운동이 500년 전에 유럽에서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오늘날도 그러한 종교개혁이 부단히 일어나고 있느냐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누추한 한국교회의 현실 때문에 종교개혁을 부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종교개혁은 오늘도 부단히 개혁되어 가야 한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개혁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첫째, 그릇된 이신칭의 교리를 수정해야 한다. 개신교회 신학의 제일 공리는 '이신칭의'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개혁 신학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주의와 행위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그릇된 신학과 전통에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신칭의는 한국교회 안에 행위 없는 구원이라는 값싼 은총이 유포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선언은 바울 신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디에서도 행위 없는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 바울이 가르친 이신칭의 교리와 한국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바로 이 간격이 부단한 개혁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교리와 신학이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같지 않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수정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 아닌가. 종교개혁자들이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자'면서 성경을 보았듯이 우리도 근본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신칭의 교리를 고백하는 것과 함께 한국교회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몇 가지 조악한 교리들 안에 갇혀 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대속설에 대한 이해인가. 그것에 대한 지적인 동의인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특정 교리에 대한 이해나 동의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예수는 주'이시라는 원초적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이해나 지적 동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예수님이 주(王)냐, 카이사르가 주(王)냐를 결단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다. 아무런 위협도, 부담도, 책임도 없이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루터가 갈라디아서는 '나의 아내'라고 말하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라고 말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영과 육을 분리하는 영지주의와 가현설 이단이 만연하고 있다.
예정론의 회복
둘째, 그릇된 예정론을 교정해야 한다. 예정론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신학 논쟁인데, 특히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벌어졌던 세기의 논쟁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계속 있어 왔던 논쟁이다. 예정론은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갖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는 교리이다. 이러한 예정론은 핍박의 시절을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와 확신의 원천이 되었다. 어떠한 환란과 핍박에도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견고하게 붙드실 것이라는 확신은 그러한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오늘날 예정론은 그릇된 구원의 확신을 조장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김세윤 박사가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그러므로 신자는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는 괘념치 말고 오직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체 이러한 예정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쯤 되면 한국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구원파'와 다름이 없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칼빈주의 예정론의 요약이다. 하지만 칼빈은 위에서 말한 식으로 예정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예정이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속에 감추어져 있으니 성화의 열매를 통해서 자신이 택자로 예정되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확증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반론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오늘날 유포되고 있는 구원의 확신 교리는 칼빈주의도 아니고, 아르미니우스주의도 아니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루터와 칼빈에 대한 신학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그러한 연구 작업이 그릇된 예정론을 교정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칼빈의 신학이나 루터의 신학이 점점 교회의 강단과 관련이 없어져 버린 탓이 아닐까. 하지만 본래 그들의 신학은 철저하게 강단을 위한 신학이 아니었던가. 참으로 유감인 것은 오늘날 칼빈의 신학이나, 루터의 신학은 한국교회에서 중세교회의 스콜라적 사변 신학이 되어 버렸다. 신학자들은 한국교회의 현실과 아무 관련도 없고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나를 따르라>에서 본회퍼가 말한 대로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철천지 원수다. 오늘날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허다한 종교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 데 분주하다.
하나님나라의 회복
세 번째로 하나님나라 복음을 부활시켜야 한다. 한국교회의 목사들 대부분이 신구약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무지한 현실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요, 몸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나라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금 여기(here & now)를 살아 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음은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나라의 복음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식 복음은 구원을 타계화한다. 구원은 죽은 뒤에 영혼에게 주어지는 복된 상태라고 본다. 두 번째로, 이러한 복음은 하나님나라를 장소적인 의미의 유토피아로 생각하게 만든다. 세 번째, 이러한 복음이 이신칭의와 결합하면 구원을 개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구원을 개인화, 내면화, 탈역사화시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에 큰 발전을 보인 하나님나라 신학은 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나라는 장소적인 의미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죽은 뒤 우리의 영혼이 이 땅을 떠나서 날아가야 할 곳이 아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 하나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으로 내려온다. "나라가 (이 땅으로)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종종 경건한 신자들은 '빨리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요'라고 고백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는 놀랍게도 하나님나라가 빠져 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한 예수님도 빠져 있다. 복음서를 읽어 보라. 그리고 그 속에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부활시켜라. 종교개혁자들이 역사적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부족한 것은 종교개혁의 한계를 보여 준 한 단면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생애와 그 분이 하신 말씀을 직접 들어야 할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러한 개념이 다소 낯설었다. 물론 루터나 칼빈도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해했으며, 가르침을 남겨 놓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신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 않다. 모든 우상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개혁가들의 시대적, 역사적, 신학적, 인간적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정확하게 종교개혁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상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새롭게 이해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적 한계를 뛰어 넘어 그들이 시작한 개혁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킨다는 의미가 될 수밖에 없다.
교회론의 회복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교회론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을 해야 한다. 종교개혁가들이 거대한 조직으로서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교회론을 약화시켰다. 당시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했던 것은 구원론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러한 신학적 불균형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개혁의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을 개혁해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 '가나안 교인'(교회에 '안 나가'는 교인)이 증가하고 있다. 어떻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이 가능한가. 개신교 신학의 패러다임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답하기란 쉽지 않다. 개신교 신학에서는 교회론보다는 구원론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교회론은 하나님나라의 모델로서의 교회다. 구원을 교회와 무관하게 받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더라도 그의 구원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만일 가나안 교인이 지역교회에서 큰 상처를 받아서 신앙을 실족하기 직전에 처한 경우라고 생각해 보자. 그럴 경우, 그는 '제가 교회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시험을 덜 받고 그나마 이렇게 믿음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있는 겁니다'라고 항변한다면, 대답할 말이 있는가.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fink)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의 서론에서 개신교회의 이러한 교회론적 곤경을 잘 지적했다. 구원이 개인에게 오고, 무엇보다도 마음속에만 주어진다면 그에게 교회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들의 모임, 동호인 모임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 공동체, 대항 공동체, 대안 공동체이다. 세상 나라가 공중 권세 받은 자가 다스리는 곳이라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다. 세상과 대조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한국교회가 가진 대조성이 과연 무엇인가. 이론과 실천, 신학과 실천의 사이가 이렇게도 다를 수 있는가. 우리는 교회를 보고 근사치적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는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거점이요, 전진기지다. 교회는 하나님나라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존재로 담아내는 그릇이며, 담지자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라는 진귀한 보물을 숨기고 있는 밭이다. 마치 농부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내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최고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나라와 구별된 대조 공동체인 교회는 폭력과 위선과 거짓과 권력과 돈이 왕 노릇하는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교회가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 교인과 교인이 아닌 사람 사이에 무슨 다른 점이 있는가. 세상의 모든 기관과 조직들이 효율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개혁을 요구받고 있는 마당에 교회만은 폐쇄적이고, 가장 반개혁적, 반개방적 폐쇄 집단이 되고 있다. 교회가 약자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에 서고, 정의를 부르짖는 편이 아니라 기득권의 지배를 옹호하며,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권력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지독한 자기 보호 본능,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공격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한국교회는 마치 자폐증 환자와 다름없다. 이러고서야 어찌 우리가 스스로를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루터와 칼빈이 부활하여 한국교회를 보고 무엇이라 할까.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 추기경을 통해 말했듯이 지금 예수님이 한국에 오신다면 "우리는 당신이 없어도 우리의 종교는 잘 되어 가고 있으니 여기서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
종교개혁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그것은 기존의 체제(status-quo)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체계를 전복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통치하고 있는 이 세상 나라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들고 오셨다. 이 복음은 지금의 세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현실 거부 선언이었다. 만일 현 체제로 충분하다면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는 예수님의 복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현 체제가 충분치 못하며, 현 체제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그렇다고 진보와 보수의 논쟁에서 진보의 편에 서자는 말은 아니다. 진보라 하더라도 어떤 진보인가. 그리고 그 진보가 성경의 가르침과 맞는가 하는 문제는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에 아부하고, 돈과 권력의 길을 뒤쫓는 보수 세력과 기독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가능하지 않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늘 현 체제를 긍정하고, 기득권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해 왔으나 그러한 교회는 언제나 버림받았다. 영국 사회학자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말하기를 "악이 승리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로서 기득권층에 편승하는 일을 멈추라!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들이다. 프로테스탄트는 항상 저항하는 자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아들로서 그 시대의 한계를 지닌다. 종교개혁자들 역시도 그 시대의 아들로서 그들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종교개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들이 시작한 개혁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500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을 새로이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종교개혁자들이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성경을 보았듯이 우리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아가 진정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끄 엘륄이 말했듯이 기독교 계시는 이론이나 신학이 아니라 오직 실천으로만 그 진리성이 입증된다.
만일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려거든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이 축자 영감되었다고 주장하라.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축자 영감되었다고 주장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 대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축자 영감되었다고 믿고 지금 여기서 순종하자. 간디가 말했던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그리스도인만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이비 크리스천이 아니라 진짜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울려 퍼질 때 종교개혁의 전통은 다시 이어질 수 있다.
참된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가 말한 것을 지금 대면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모든 해석은 상황과 선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은 2000년이나 된 고문서가 아닌가? 그러한 고문서의 해석이 어찌 간단한 작업이 될 수 있겠는가. 루터나 칼빈, 혹은 그 어떠한 신학자도 직접 신구약성경의 가르침에 도달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떨칠 수 없는 선이해가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우리의 선이해에 의해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인문학적, 과학적, 그리고 신학적 연구 성과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참고 서적 없이 성경을 맨눈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순진한 해석학적 주장일 뿐이다. 아울러 성경을 500년 전의 인물의 해석을 통해서만 이해하려는 태도 역시 무책임한 태도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가 그의 <일반 은총>에서 잘 지적했듯이 모든 지혜와 부, 인문학이나 과학과 같은 학문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창조신학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신학은 창조신학과 함께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톨릭과 루터주의의 이원론에 빠질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믿어 천당 가고,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겨우 그런 정도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과 그 하나님 아들이 이 땅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해서 이 땅이 결정적으로 회복될 수 있게 되었으며, 미래에 하나님나라가 이 땅 위에 완전하게 임하리라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들을 불러 이 땅의 회복을 위해 함께 동역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이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를 통해 이 땅이 회복되게 하시리라는 놀라운 약속이 바로 우리가 붙드는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기독교인이자 세계적 철학자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가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말했듯이 참된 기독교는 도피적 기독교가 아니라 형성적 기독교(world formative christianity)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
박철수 목사 / 전 분당두레교회 담임, <축복의 혁명> 저자 뉴스엔조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