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하여? (Q&A) / 박신 목사
[질문]
손기철 장로님의 치유 사역에 관해 질문 드립니다. 목사님도 손 장로님의 치유 사역은 알고 계시는지요? 저도 지인을 따라 오래 전에 치유사역예배에 참석해 봤었고, 그 분의 책도 읽어봤습니다. 그러면서 든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은 치유사역이라는 영역만 다를 뿐 말씀도 복음적으로 전하시며 크게 이상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을 두고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등 의견이 매우 분분하지요. 저희 교회 담임 목사님도 손 장로님의 책과 사역을 오래 전에 이단으로 낙인 찍어둔 상태입니다(장로교 합동). 그러나 손 장로님의 성품과 말씀 등 여러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는 이단이나 거짓 같지는 않아 보여서 말입니다. (물론 성령님을 다루(?)시는 모습은 조금 지나치다 싶지만요~)
질문을 다시 정리하자면요, 치유 사역은 하나님 안에서 오늘날에도 정당한 사역인지 궁금하고, 손 장로님에 대해 혹시 알고 계시다면 이 분의 치유 사역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궁금합니다(물론 치유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자 전부라는 말씀은 아닌 것 아시죠?).
아울러 치유 사역에서 자주 사용되는 밑의 구절도 함께 주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는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7, 18)
[답변]
저는 손 장로님에 대해 간혹 기사로는 접했지만 그분의 집회에 참석한 적도, 책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 그분의 신앙노선이나 주장하고 가르치는 바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 제가 그분을 평가할 입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거기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분에 대해 오래 동안 추적 연구해 놓았습니다. 그런 연구의 결과를, 그분에 대한 반대든 찬성이든, 성경 진리와 객관적 논리적으로 잘 대조하여 취할 것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 입장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계시인 성경이 완성된 후로는 성령의 은사가 종료 내지 중지되었다는 주장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 신학적 논의를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큰 병을 앓을 때에 치유의 은사를 맛보았습니다. 또 제가 기도하여 다른 분의 병이 나은 적도 몇 번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주제와 상관없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지금 드리는 답변은 치유사역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일 뿐입니다. 질문자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정리하는 셈입니다.
표적과 기사
저는 고린도전서 12:4-11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가 지금도 “모든 신자에게, 자주는 아니지만” 다 실현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선교지에선 더 활발히 나타납니다. 치유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 잘 분별하여 올바르게 대응해야만 합니다. 주해를 부탁하신 구절이 치유 이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기에 아주 적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는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또 온전한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여러 표적들이 따른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기적은 우리말로 표적, 이적, 기사 등으로 번역됩니다. 표적(標蹟-signs))과 이적(異蹟-miracles)의 헬라 원어는 동일하게 ‘세메이온’입니다. 그 뜻은 전조, 징조, 신호, 표시, 기사 등입니다. 기사(奇事-wonders)는 ‘테라스’로 그 뜻은 경이, 징조, 기적입니다. 어감상 기적에 가까운 말은 기사이지만 둘 다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여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적과 표적은 혼용하고 있습니다.
표적, 이적, 기사 어떤 용어로 번역되었든 먼저 주지하셔야 할 사항은 그 일이 결코 “항상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항상 일어나면 초자연적인 일도 아닙니다. 매번 어떤 일을 일으킬 수 있으면 그런 “능력을 소지”한 것입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종종 어떤 일을 일으키면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입니다. 치유의 은사가 없어지거나 중지되진 않았어도 항상도 아니고 자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것만으로도 치유 집회에 구태여 참석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이 상기본문을 포함하여 초자연적 기사를 구태여 ‘표적’이라고, 특별히 요한사도는 오직 표적이라고만 말한 뜻이 있습니다. 요한의 말을 그대로 옮겨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예수님이 표적을 일으킨 것은 오직 당신께서 그리스도임을 그 표적을 보는 사람들로 믿게 하려는 목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의 첫째 기능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표지판의 용도는 주로 최종 목적지나 도착지를 알리기보다는, 그곳으로 가는 방향과 거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태여 표적이라고 말한 까닭은 기적을 오해 말라는 것입니다. 기적 자체나 그로 인한 유익한 결과를 바라지 말고 기적을 통해 그것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누구인지 곰곰이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메시아인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판단해보라고 했습니다.(마11:4) 당신이 행하신 초자연적 역사가 바로 메시아의 증표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예수님)이나타내셨느니라.”(요1:1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7,38)
표적의 또 다른 기능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한다고 합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믿을 때에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신자가 살아났기에 앞으로 어떤 핍박도 그분의 이름의 권능과 사랑을 확신한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선 지금도 일어나는 치유의 은사
선교지에서 치유의 은사가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것도 그때까지 우상숭배를 하든 이방족속더러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해서 믿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그 마음이 더 잘 열리도록 하는 예비조치인 셈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적으로 병을 낫게 해주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왔으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마1:38)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오직 복음전파가 이 땅에 오신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제가 기도하여 이적이 일어났던 경우도 동일합니다. 불신자였던 자에게 단순하게 하나님 살아계심과 예수님의 이름의 권능을 알게 해달라고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본인도 오직 그런 순전함으로 기도했더니 이곳 미국 심장전문의도 깜짝 놀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치유의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본인이 굳건한 믿음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그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고 일으킨 일이었을 뿐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은 오히려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이 세대를 음란하다고 꾸짖으며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마16:4) 고래 배속에 삼 일간 있다 살아난 요나처럼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최종적인 구원의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십자가 부활을 보고 당신이 메시아임을 믿는 것 이상의 표적은 없으며 인간이 봐야할 표적으로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권능을 많이 베푼 고을이 더 믿지 않았으며,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치유집회에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따지면 치유를 주목적으로 하는 집회는 해서도 안 됩니다. 선교지에서처럼 불신자 전도를 위해 복음을 증거하다 보면 치유의 이적도 나타나는 집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 치유의 기적이 항상 혹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간과해선 안 됩니다. 더더욱 치유가 목적이어선 안 되지 않습니까? 복음이 빠진 치유집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역사하는 힘이 있는 의인의 기도
간혹 믿은 지 오래인 신자 중에도 그런 집회에서 신유의 은사를 가진 분에게 기도를 받으면 나을 것 같은 기대로 참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에는 믿는 자 누구에게나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합니다. 믿는 자에겐 상기에서 말하는 표적이 따를 수 있습니다. 단 항상도 자주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뜻에 따라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목적으로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그런 집회에 가도 별무소득입니다. 그런데 왜 참가해야 합니까?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의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4-16)
병든 신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함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자”가 아닙니다. 장로는 교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항상 돌봐주는 직책입니다. 거기다 믿음과 인격과 평소 품행이 좋습니다. 성도들이 맡은 직분과 관계없이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하나님 앞에 함께 보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기름은 당시에 치료에 자주 사용되던 일종의 약입니다. 일반 의술도 의존하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혹시 지은 죄가 있으면 죄부터 고하라고 합니다. 반드시 도덕적 종교적 죄 때문에 그 병이 생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것은 질병에서 낫는 것보다 거룩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고 하지 않고 단순히 “많다”고 합니다. 기도한다고 항상 낫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도도 고질병이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면서 사실상 응답이 거절되었습니다. 당신의 그 큰일을 하는 사도인데도 말입니다. 그는 평생 그 질병으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는 오히려 그 약함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더 도움이 되기에 자랑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의인의 간구가 힘이 많다고 하면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엘리야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의 기도로 삼년 가물게 하고 또 그의 기도로 해갈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칫 성정이 같은 우리의 기도로도 얼마든지 병이 나을 수 있겠다고 착각합니다. 엘리야는 아합 시대의 우상숭배로 타락한 북이스라엘을 심판해달라고 기도했으며, 자기 생명을 걸고 450명의 바알선지자와 홀로 맞서며 기도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 가운데 엘리야와 같은 기도를 하는 자가 있습니까? 자기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이 땅에 온전히 실행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 적도, 아니 그런 기도를 할 마음도 없으면서 “왜 치유가 안 되지? 성정이 같은데... 내 믿음도 좋은데...”라고 의심 불평할 수 있습니까? 그저 몸이 조금 불편한 정도를 가지고 기적적으로 낫게 해주면 감사 헌금 더하겠다는 정도 아닙니까? 그 정도라면 자기가 혼자서, 아니면 가족이나 구역 성도끼리 순전한 마음을 갖고 기도해도 되는데 왜 (일부는 그 목적과 가르침이 상당히 잘못된) 치유집회에 가야만 합니까?
자기 잘못을 하나님더러 책임지라는 신자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질병의 거의 전부가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자기가 온전히 보존 유지하지 못한 잘못 때문임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간혹 유전적 질병이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몸을 귀하게 다뤄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치유의 기도는 자기 잘못한 것을 하나님더러 고쳐놓으라고 떼를 쓰는 꼴입니다.
물론 신자가 잘못한 것들을 하나님이 고쳐주시지만 그런 요구를 하려면 그 잘못을 단순히 용서만 빌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고쳐나가야 합니다. 잘못된 식습관과 운동부족을 고치고 평소 스트레스를 말씀과 기도로 해소 하며 이웃과 참된 교제 등을 성실히 행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후에 간절히 기도해도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치유 여부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아주 드물게 치유의 표적을 맛보았다 해도 그 치유는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노쇠하기 마련이고 또 치유의 표적 이후에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전보다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기적적으로 고쳐준 하나님만의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그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더 큰 벌을 받습니다. 요컨대 신자들이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하고 엄청난 일인지도 모르고 구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나 바울과 똑 같은 위치에서 동일한 사명을 죽기까지 감당할 결단과 헌신이 없다면 사실은 쉽게 구해선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주면서 또 베데스다 못가의 행려병자를 치유해주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엄격히 당부했지 않습니까?
심지어 주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이런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그럴 리는 없지만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기쁘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질병이 정말로 신자가 하나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낫게 해주실 수 있지만, 단지 병만 고쳐달라는 기도까지 일일이 응답하실 지는 의문입니다.
바울의 고질병을 많은 학자들이 간질로 보는데 만약에 사도가 발작을 일으키면 얼마나 은혜가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거절했어도 어쩜 혼자 있을 때만 발작이 나게 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뜻은 그 병으로 그를 자고하지 않게 더욱 겸손케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치유를 결정하고 시행하십니다. 당신만의 특별한 뜻이 있을 때, 특별한 사람과 때와 방식으로만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이미 믿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교회성장 목적의 행사나 의식처럼 이뤄지는 치유집회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얼마나 큰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높이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8/24/2015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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