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죽음을 생각해보았소? 당연히 그랬을 거요. 그걸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오. 사람만이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면서 사는 동물이라오. 죽음을 생각한 다음에 기분이 어떻소? 그것을 어느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거요. 모든 영혼을 걸 정도로 진지하다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요.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의미 있는 게 없기 때문이오. 대개는 가볍게 생각하오. 사람이 다 죽기는 죽는 모양이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오. 한번 생각한 뒤에는 가능한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오. 죽음을 직면하기 싫어하오.
죽음을 직면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일단 죽음 자체가 두렵기 때문일 거요.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는 사건인 죽음이 왜 두렵지 않겠소. 우리는 서로 어울리면서 삶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런 어울림이 완전히 해체되는 죽음이 왜 두렵지 않겠소. 그런 관계가 고통인 사람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일 거요.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오. 일반적으로는 아무도 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오. 그것이 다행이오.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자살은 더 흔한 일이 되고 말테니 말이오.
죽음에 직면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만이 아니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야 대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소. 아무도 죽음을 모르오. 나의 실존이 사라지는 세계는 상상할 수도 없소. 이는 마치 사람이 개미의 세상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오. 개미의 세상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나’라는 실존이 사라진 세상은 생각할 수가 없소.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직면하지 않소. 직면 자체가 두렵소. 그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사는 것이 편하오.
직면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오. 직면해봐야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게 옳은 삶인지, 아니면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직면하고 사는 게 옳은 삶인지 우리가 선택해야 하오. 잠언 7:4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혼인집에 있다고 하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혼인집으로 비교하시곤 하셨소. 하늘나라는 혼인집과 같은 축제라는 뜻이오. 그것과 초상집을 찾는 지혜로운 사람을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소. 이런 구절들은 비유요. 이렇게 말할 수 있소. 죽음을 직면하는 사람만이 삶이 축제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소. 오늘 나는 쉰다섯 살의 나이로 죽은 어떤 남자의 입관예배를 집전하고 돌아왔소. (2010년 11월11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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