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갈 4:12-20)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7. 20. 06:25

해설: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12절)라고 말한다. “바랍니다”라는 번역은 강세가 약하다. “요청합니다” 혹은 “호소합니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바울이 그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처럼 “율법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그들처럼 되었다. 그러니 그들도 자신처럼 “율법 없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유대인인 바울에게 자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 희생은 그들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 바울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도가 병들어 아플 때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토 프로테론”(13절)은 새번역처럼 “처음으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이전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사도가 갈라디아 지방에 찾아가 복음을 전한 것은 그의 질병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육체적인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냉대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몸에 질병(혹은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도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14절) 영접해 주었다. 

 

“마카리스오스”(15절)는 “감격”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개역개정처럼 “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자신과 갈라디아 교인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뜨거운 사랑은 복이었다. 그들은 사도에게 눈이라도 빼어 주고 싶어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바울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다(16절).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진리를 말한 것 뿐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심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열심의 강도가 아니라 열심의 동기가 더 중요하다. 그들의 동기는 사도로부터 갈라디아 교인들을 떼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17절). 그들이 좋은 뜻으로 한 일이라면 자신은 그 일로 인해 기뻐했을 것이다(18절). 사도가 그들의 태도에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 이유는 자기 사람들을 잃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구원의 복음에서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19절)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그리스도께서 형성될 때까지”라고 해야 한다. 그는 지금 그들의 태도에 너무도 당혹스러워서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지금 격한 어조로 글을 쓰고 있는데, 그 자신도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20절). 

 

묵상:

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생명과 생명이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생명이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를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옛 자아는 죽고 새 자아가 태어난 것입니다. 거듭 났다 혹은 중생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그는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2:20)라고 했습니다. 

 

모태 안에 자리 잡은 태아가 자라는 것, 태어나는 것, 태어나서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에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태아 자신도 어머니에게서 넘어오는 양분을 받아 들여야 하고, 임산부도 태아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영양을 섭취하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처럼, 우리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께서 우리 존재 전체를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태아에게 가정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수 많은 사람들의 해산의 수고로 인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나를 통해 그 존재를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도록 나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