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바울 사도는 자주 독자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방식(디아트리베)으로 논지를 이끌어 간다.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으니, 독자들은 당연히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19절)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율법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이라는 말은 인간이 죄에 물들었기 때문에 후에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라는 말은 율법이 한시적인 조치로서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 후손”은 아브라함과 같이 약속을 받은 “그 씨앗”(16절)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는 모세가 천사들을 통하여 율법을 받았다는 뜻이다. 중재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소통하도록 돕는다(20절).
사도는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입니까?”(21절). 율법이 인간의 죄성 때문에 나중에 더해진 것이라면,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율법은 “그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개인교사”(개역개정 “초등교사”, 24절) 역할을 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개인교사(파이다고고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어린 자녀를 위해 한시적으로 고용한 교사를 가리킨다. 주로 집안에 있는 노예들 가운데 나이 들고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을 개인교사로 사용한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개인교사의 역할은 끝나고 정식 교사에게 인계된다. 사도는 율법을 개인교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정식 교사에 비유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열렸으니 율법은 시효를 다한 것이다(22-25절).
이렇게 말한 다음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말한다. 그들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26절).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 되었다(27절). 그 점에 있어서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28절).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으며, 주인도 있고 종도 있으며, 유대인도 있고 그리스 사람도 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다른 점들이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있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이다(29절).
묵상: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덕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을 살해한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법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사람을 살해하는 데까지는 가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법은 죄 된 인간을 선도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안전장치입니다. 법이 없으면 인간의 죄성은 제한 없이 표출될 것이고, 사회는 현실 지옥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은 칭찬이 됩니다. “법은 죄 지은 사람을 벌 주기 위함이 아니라 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웬만한 도덕성을 가진 사람은 법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매사에 법을 따져 가면서 법에 저촉되지 않는 길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법망을 피하여 죄를 행하려는 꼼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요즈음에 ‘법 기술자’ 혹은 ‘법꾸라지’라고 부릅니다. “법 대로 하자”는 말은 죄 된 본성을 싸워 보자는 뜻입니다.
율법도 속성에 있어서는 일반 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더 나은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를 짓더라도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한시적인 것이고 후에 더해진 것입니다(19절). 따라서 “율법대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을 정도에서 죄를 즐기겠다는 뜻이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죄성이 너무나 집요하고 교묘하여 그 경계선을 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율법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심하기 전의 사울이 가졌던 오해이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오해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안전장치 혹은 현상유지의 도구입니다. 율법을 행하여 죄된 본성을 바꿀 수도 없고 의롭게 살 수도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고 저주를 쌓는 결과에 이를 뿐입니다. 율법 준수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결국 저주를 쌓는 결과에 이른다면,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22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든 율법 있는 유대인이든, 죄 된 삶을 통해 저주를 쌓았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모든 인류가 받을 저주를 모두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씨앗 한 톨의 죽음은 그 씨앗 안에 담긴 수 많은 생명의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 안에 담긴 온 인류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를 옷으로 입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그가 받은 약속에 참여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율법 없이, 율법을 초월하여, 율법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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