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교회 출현은 세계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생각했던 고정관점을 깨트리고, 온 세상을 향해서 주어졌으며, 전해져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정착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 흩어졌는데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구속의 은혜가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여겼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수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함으로써 안디옥에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리아 안디옥은 3십만 명 정도의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고, 여러 민족이 함께 모여 사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 교회를 세우면서 우리끼리, 같은 민족끼리 모이기 좋아하고, 거기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그것을 뛰어넘어 여러 민족과 인종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모범입니다.
안디옥교회 ‘예언자들과 교사들’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된 바나바가 다소에 있었던 사울을 교사로 초청합니다. 사울이 다소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예루살렘교회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그를 배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것을 뛰어넘어 사울을 부르신 하나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뛰어넘어 사울을 안디옥교회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세계 교회 역사의 중요한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사도행전> 13장 이후부터 사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사울만 세워진 게 아닙니다. 사울 외에도 여러 지도자가 세워졌습니다. 그들도 사울처럼 바나바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디옥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습니다”(1절).
당시 교회 지도자들을 일컫는 명칭이 ‘예언자들과 교사들’입니다. 바나바가 명단에서 가장 먼저 나오고, 사울이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헬라어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가장 앞과 맨 뒤에 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을 배열합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와 사울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명단이 다양한 배경을 보여줍니다. 먼저 인종을 초월했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에서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역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 유대인입니다. ‘니게르’는 로마 이름입니다. 시므온은 전통 유대인 이름입니다. 북아프리카, 로마, 유대 등 여러 출신 사람들이 함께 지도자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초월했습니다. 흥미로운 이름이 나오는데,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입니다. 분봉왕 헤롯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것은 친족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자랐다는 것은 그가 로마 제국 시대에 분봉왕으로 임명된 친족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특별한 귀족이었다는 뜻입니다. 또 흥미를 끄는 이름이 ‘니게르라는 시므온’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아마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이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인종 등 많은 것을 초월하는 세상 사람들끼리만 모이라고 한다면 절대 모일 수 없습니다. 너무 불편하고, 모일 이유도 없습니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함께 이득을 보기 위해 모인다면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닌 이유로 이 사람들이 함께 모였고, 그들이 함께 리더십을 형성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와 다른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더 넓게 쓰임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유대 민족 중심의 교회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명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선교적 교회는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나 장벽이 없는 교회입니다. 단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교회, 사역을 많이 한 교회를 일컫는 게 아닙니다. 먼저 공동체 내부의 복음화가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공동체 내부의 복음화란 안디옥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아무리 많이 파송하고, 후원할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 내부에 벽이 생기고, 갈등이 깊어지고, 계파가 생기고, 그룹별로 갈등하고 다투면 선교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하나 됨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연합하는 것이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졌습니다. 세리 출신 마태도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을 증오하고, 정치사회적으로 공격했던 ‘열심당원’이라고 하는 사람 출신 시몬도 있었습니다. 마태와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며 삶을 나눠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또 가룟 유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같은 사람은 어부 출신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첫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 사람들을 모으신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도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달라서 힘든 게 아니라 다르기에 멋있게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화음으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공동체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요 17:21).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계신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때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고,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교회에서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은 죄인인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처럼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서로 인격의 차이, 선호도의 차이, 방식의 차이는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 안에서 참된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안디옥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습니다”(1절).
당시 교회 지도자들을 일컫는 명칭이 ‘예언자들과 교사들’입니다. 바나바가 명단에서 가장 먼저 나오고, 사울이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헬라어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가장 앞과 맨 뒤에 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을 배열합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와 사울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명단이 다양한 배경을 보여줍니다. 먼저 인종을 초월했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에서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역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 유대인입니다. ‘니게르’는 로마 이름입니다. 시므온은 전통 유대인 이름입니다. 북아프리카, 로마, 유대 등 여러 출신 사람들이 함께 지도자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초월했습니다. 흥미로운 이름이 나오는데,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입니다. 분봉왕 헤롯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것은 친족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자랐다는 것은 그가 로마 제국 시대에 분봉왕으로 임명된 친족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특별한 귀족이었다는 뜻입니다. 또 흥미를 끄는 이름이 ‘니게르라는 시므온’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아마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이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인종 등 많은 것을 초월하는 세상 사람들끼리만 모이라고 한다면 절대 모일 수 없습니다. 너무 불편하고, 모일 이유도 없습니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함께 이득을 보기 위해 모인다면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닌 이유로 이 사람들이 함께 모였고, 그들이 함께 리더십을 형성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와 다른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더 넓게 쓰임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유대 민족 중심의 교회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명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선교적 교회는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나 장벽이 없는 교회입니다. 단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교회, 사역을 많이 한 교회를 일컫는 게 아닙니다. 먼저 공동체 내부의 복음화가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공동체 내부의 복음화란 안디옥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아무리 많이 파송하고, 후원할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 내부에 벽이 생기고, 갈등이 깊어지고, 계파가 생기고, 그룹별로 갈등하고 다투면 선교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하나 됨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연합하는 것이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졌습니다. 세리 출신 마태도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을 증오하고, 정치사회적으로 공격했던 ‘열심당원’이라고 하는 사람 출신 시몬도 있었습니다. 마태와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며 삶을 나눠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또 가룟 유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같은 사람은 어부 출신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첫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 사람들을 모으신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도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달라서 힘든 게 아니라 다르기에 멋있게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화음으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공동체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요 17:21).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계신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때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고,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교회에서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은 죄인인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처럼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서로 인격의 차이, 선호도의 차이, 방식의 차이는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 안에서 참된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님의 음성 듣고, 순종
성령님의 음성 듣고, 순종
안디옥교회가 세계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온 교회가 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주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한 후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2~3절). ?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차이점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학자들이 선교적 교회의 시초라고 하지 않고, 안디옥교회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교회가 선교 사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룻다와 욥바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적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핍박에 의해 흩어져 수동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예배 가운데 금식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고 능동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만일 스데반의 핍박이나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이 없었다면 흩어졌을까요? 결론적으로 복음을 전하긴 했지만 외부적 요인에 의해 흩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흩어진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선교적 교회’란 말을 사용하면 ‘정신없이 사역들로 꽉 차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십시오. 예배와 금식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경건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리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교회의 두 기둥입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순종했습니다.
선교사 조성록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김영길 장로님이 1990년 일본에서 열리는 창조과학세미나 통역자로 조성록 목사님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때 창조과학자들이 “아니, 그렇게 일본어를 잘 하시는데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성록 목사님이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조성록 목사님을 일본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1994년 3월 30일 조성록 목사님 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이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일본이었다. 그러나 내가 머지않아 생을 마치는 날을 생각하면서 일본인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결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일본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고 일본에서 사역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최후의 사명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조성록 목사님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사역하신 교회가 지금 일본 비전교회가 되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성수 장로님은 치과 의사를 정리하고 중국으로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나에게 축복이었다>는 자서전에서 이런 내용을 고백합니다.
“중국으로 가겠다는 마음만 있었지 정작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막상 떠나려 하니 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20여 년 동안 번창해 마련한 강남의 좋은 저택. 10여 년 동안 가꿔온 경기도 광주의 농장 등을 비롯해 집착하며 붙들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포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체험한 것 같다.”
그때 최성수 장로님 가족들이 농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가족들의 팔 다리가 부러지고, 장로님도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때 병실에 누워 말씀이 갈급해 성경을 펴셨는데 <누가복음> 12장 20~21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 네 영혼을 네게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너를 위해 장만한 것들을 다 누가 갖게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최성수 장로님은 그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국으로 떠나셨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파송을 받아 떠나는 모습을 보는 성도들은 안디옥교회가 터전이고, 마당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선교적 교회의 모델로 역사에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한 후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2~3절). ?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차이점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학자들이 선교적 교회의 시초라고 하지 않고, 안디옥교회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교회가 선교 사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룻다와 욥바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적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핍박에 의해 흩어져 수동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예배 가운데 금식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고 능동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만일 스데반의 핍박이나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이 없었다면 흩어졌을까요? 결론적으로 복음을 전하긴 했지만 외부적 요인에 의해 흩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흩어진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선교적 교회’란 말을 사용하면 ‘정신없이 사역들로 꽉 차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십시오. 예배와 금식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경건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리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교회의 두 기둥입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순종했습니다.
선교사 조성록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김영길 장로님이 1990년 일본에서 열리는 창조과학세미나 통역자로 조성록 목사님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때 창조과학자들이 “아니, 그렇게 일본어를 잘 하시는데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성록 목사님이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조성록 목사님을 일본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1994년 3월 30일 조성록 목사님 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이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일본이었다. 그러나 내가 머지않아 생을 마치는 날을 생각하면서 일본인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결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일본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고 일본에서 사역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최후의 사명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조성록 목사님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사역하신 교회가 지금 일본 비전교회가 되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성수 장로님은 치과 의사를 정리하고 중국으로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나에게 축복이었다>는 자서전에서 이런 내용을 고백합니다.
“중국으로 가겠다는 마음만 있었지 정작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막상 떠나려 하니 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20여 년 동안 번창해 마련한 강남의 좋은 저택. 10여 년 동안 가꿔온 경기도 광주의 농장 등을 비롯해 집착하며 붙들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포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체험한 것 같다.”
그때 최성수 장로님 가족들이 농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가족들의 팔 다리가 부러지고, 장로님도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때 병실에 누워 말씀이 갈급해 성경을 펴셨는데 <누가복음> 12장 20~21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 네 영혼을 네게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너를 위해 장만한 것들을 다 누가 갖게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최성수 장로님은 그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국으로 떠나셨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파송을 받아 떠나는 모습을 보는 성도들은 안디옥교회가 터전이고, 마당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선교적 교회의 모델로 역사에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다
그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서로 싸우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믿지 않는 영혼들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란 언제나 영적 싸움에 직면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보냄을 받습니다. 첫 번째 보냄을 받은 지역은 지중해 ‘키프로스’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1~3차 여행이 나옵니다. 지명도 많이 나옵니다. 키프로스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고향이기 때문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가 강력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키프로스는 로마의 한 도시로서 지하자원이 풍부했습니다. 특히 구리가 많았습니다. 광산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키프로스 지역을 관통할 때 해안선을 따라 가면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산을 넘어 건너갔습니다. 그 이유는 광산이 많아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 지역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키프로스의 수도였던 바보(파포스)는 비너스를 숭배하는 퇴폐적인 도시였습니다. 미신이 성행하는 도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정치가들이 마술사들을 의지하고, 자신의 미래와 국가의 운명을 마술사에 맡기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 지역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도 엘루마라는 마술사를 의지하고 많은 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술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키프로스 섬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변화된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역사가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담대하고 순전하게 전하면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다른 무기는 방어 무기입니다. 방패, 허리띠, 투구 등은 방어 무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검입니다. 이것이 전해졌을 때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당시 키프로스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까지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루마라고 하는 마술사가 서기오 바울이 믿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위축되고 밥그릇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이 엘루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엘루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너는 갖은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구나. 주의 바른길을 어지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이제 주의 손이 너를 치심으로 네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쳤고 그는 이리저리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9~11절).
바울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엘루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선포했습니다.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이제 주의 손이 너를 치심으로 네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그의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일을 본 서기오 바울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보자 총독이 믿게 됐고 주에 관한 가르침에 그저 놀랄 뿐이었습니다”(12절).
바로 이것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키프로스의 총독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키프로스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변화될 때 그 영향력은 더욱 클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안디옥교회가 복음 안에서 서로 하나 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때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제국이 후에 뒤집어 진 것은 바로 서기오 바울과 같은 총독이 예수 믿었던 일이 출발점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모든 계층, 모든 사람들, 어떤 민족, 어느 인종의 사람들에게도 진리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만 진리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역사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동양에서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데 서양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서구에서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데 동양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인 까닭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져서 습관과 문화는 약간 상이할 지라도 동일한 복음을 믿고, 교회가 형성되고, 복음이 계속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역사를 우리가 확신하고, 체험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온누리교회가 참된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보냄을 받습니다. 첫 번째 보냄을 받은 지역은 지중해 ‘키프로스’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1~3차 여행이 나옵니다. 지명도 많이 나옵니다. 키프로스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고향이기 때문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가 강력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키프로스는 로마의 한 도시로서 지하자원이 풍부했습니다. 특히 구리가 많았습니다. 광산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키프로스 지역을 관통할 때 해안선을 따라 가면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산을 넘어 건너갔습니다. 그 이유는 광산이 많아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 지역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키프로스의 수도였던 바보(파포스)는 비너스를 숭배하는 퇴폐적인 도시였습니다. 미신이 성행하는 도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정치가들이 마술사들을 의지하고, 자신의 미래와 국가의 운명을 마술사에 맡기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 지역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도 엘루마라는 마술사를 의지하고 많은 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술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키프로스 섬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변화된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역사가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담대하고 순전하게 전하면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다른 무기는 방어 무기입니다. 방패, 허리띠, 투구 등은 방어 무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검입니다. 이것이 전해졌을 때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당시 키프로스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까지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루마라고 하는 마술사가 서기오 바울이 믿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위축되고 밥그릇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이 엘루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엘루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너는 갖은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구나. 주의 바른길을 어지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이제 주의 손이 너를 치심으로 네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쳤고 그는 이리저리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9~11절).
바울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엘루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선포했습니다.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이제 주의 손이 너를 치심으로 네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그의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일을 본 서기오 바울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보자 총독이 믿게 됐고 주에 관한 가르침에 그저 놀랄 뿐이었습니다”(12절).
바로 이것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키프로스의 총독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키프로스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변화될 때 그 영향력은 더욱 클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안디옥교회가 복음 안에서 서로 하나 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때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제국이 후에 뒤집어 진 것은 바로 서기오 바울과 같은 총독이 예수 믿었던 일이 출발점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모든 계층, 모든 사람들, 어떤 민족, 어느 인종의 사람들에게도 진리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만 진리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역사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동양에서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데 서양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서구에서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데 동양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인 까닭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져서 습관과 문화는 약간 상이할 지라도 동일한 복음을 믿고, 교회가 형성되고, 복음이 계속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역사를 우리가 확신하고, 체험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온누리교회가 참된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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