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목사들의 꿈은 설교 잘하는 것이오. 설교 잘하는 꿈은 교회 부흥과 직결되오. 설교 잘하지 못해도 교회가 부흥된다면 굳이 그런 꿈에 매달리지는 않을 거요. 설교가 교회 부흥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소. 크게 성장한 교회의 목사는 모두 설교를 잘하지만, 설교 잘하는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가 무조건 부흥하는 것은 아니오. 교회 부흥에는 설교 이외의 요소가 작용한다는 뜻이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잘하는 설교와 못하는 설교를 어떻게 구분하는가에 있소. 청중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설교가 잘하는 것이고, 그런 반응이 별로면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긴 하오. 결국 그것도 교회 부흥과 연결되는 것 같소. 리츨이라는 설교학자는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을 했소. 좋은 설교는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당장 큰 은혜를 받기보다는 나중에 두고두고 깨우치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오. 당장 깊은 깨우침을 받는 설교가 꼭 나쁘다거나, 좋은 설교는 늘 나중에 깨우쳐야 한다는 말은 아니오. 진리의 본질을 말한 것이오. 또한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오.
청중들이 당장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설교자들이 벗어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오.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더 그렇소. 한국교회 신자들은 은혜를 받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 같은 태도로 설교를 듣소.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의 말 한 마디에 ‘아멘, 할렐루야’가 남발되고 있소. 목사의 설교 내용을 되새기면서 설교를 듣고 싶은 사람이 견딜 수가 없는 분위기요. 이런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설교 영성에 대한 집중력이오. 성서텍스트를 큰 숲이라고 생각해보시오. 그 안에 들어가서 길을 가야 하오. 그 안에 있는 소로는 아는 사람만 아오. 그걸 모르는 사람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소. 그리고 숲이 싫어지오. 숲에 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오. 성서텍스트라는 숲에 난 수많은 길들을 찾아서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남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소. 숲속의 길에 집중하는 것이오. 그것이 설교 영성이오. <설교공부> 모임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오. (2010년 10월14일, 목, 잔뜩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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