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죽었다는 말을 그대도 종종 들었을 것이오. 그 말은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뜻이오. 인간이 어찌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겠소. 모든 이들은 생각하오. 여기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돈을 버는 데는 머리를 많이 쓰지만 돈이 뭐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소. 집을 장만하는 데는 무조건 달려가지만 집이 뭐냐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없소. 이런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소.
오늘 설교자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소.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 할 수 있는지, 그래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열을 올리고 있지만 설교가 무엇인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소. 오늘 설교학 교수들의 관심도 어떻게 하면 설교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에 쏠리고 있소. 그걸 노골적으로 부추기오. 그래서 그들은 설교로 교회를 부흥시킨 목사들을 모범 설교자로 내세우고 있소. 설교는 말하는 기술로 떨어지고 말았소. 그대도 이런 기술을 배우고 싶소? 어렵지 않소. 스피치훈련, 연기훈련을 받아보시오. 개그맨 양성소에 1년쯤 다니면 청중들의 기분을 사로잡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거요.
이런 추세는 이 시대정신이 그렇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구원과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신학적 통찰마저 없기 때문이오. 청중들을 예수 믿게 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고, 교회 봉사하게 하는 것이 설교라는 생각에 고착되어 있소. 이제 필요한 것은 어떻게 기술적으로 이것을 전하느냐 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오.
내가 여러 번 짚었듯이 오늘 인문학이 실종되고 있듯이 교회에서 신학이 실종되었고, 설교자들에게 설교 행위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이 실종되었소. 꿩 잡는 게 매라는 논리가 팽배하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의 영성이 확보되리라 생각하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소. 우리 설교자의 영혼이 점점 황폐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소. 영혼의 깊이에서 대화가 통하는 설교자를 만나기 쉽지 않소. 목사들 사이의 대화도 겉도는 일이 많소. 기껏해야 목회 노하우를 교환하거나 정치 이야기뿐이오. 이런 척박한 목회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탁에 휩싸인 예언자들처럼 좌고우면 없이 말씀의 길을 갈 수 있겠소. 설교공부는 이런 길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자리요. (2010년 10월16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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