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1절부터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설명한다. 그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11절)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12절)도 아니며,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라고, 세번이나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해야 한다. “계시”로 번역되는 헬라어 ‘아포칼립시스’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13절부터 16절 전반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복음을 드러내 보여 주신 과정에 대한 간략한 술회다. 먼저 그는 자신이 유대교인으로서 누구보다 충실하게 율법을 지켰고 그 열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13-14절). 그랬던 자신이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은 자신을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불러주신”(15절) 까닭이다. 그분은 자신에게 당신의 아들을 드러내 보여주셨다(계시). 여기서 사도는 “내 안에” 보여주셨다고 표현한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사도는 그 모든 일들을 행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자신을 통해 이방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이었다(16절).
16절 하반절과 17절에서 사도는 다마스쿠스 사건 후에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회심 후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아나니아와 다른 신도들을 만났고,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가 다소로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행 9:10-30). 여기서 바울은 이 모든 세부 정보들을 생략하고 회심 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에게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게바(18절) 즉 베드로를 만난 것은 삼 년 후의 일이다. 그는 두 주일을 머물러 있으면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만을 만난다(19절). 사도는 자신이 진실만을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 다음(20절), 그 후에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고 말한다(21절). 그런 까닭에 유다에 있는 신도들은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다만 과거에 자신들을 박해했던 사람이 지금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말한다(22-24절).
묵상: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그분으로 인해 변화된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인생 여정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그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이기에 그의 인생이 이토록 심하게, 이토록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바울은 당시에 스펙 좋은 율법 교사의 창창한 미래를 포기하고 가난한 유랑 전도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 이후의 그의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했지만 그는 그것을 영예로 알았습니다. 그가 남긴 편지들을 읽어보면 그의 정신이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온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바울이 그리스-로마 시대에 나타났던 가장 심오하고 냉철한 사상가들 중 하나였다고 평가합니다. 그는 고대에 흔히 일어났던 종교 체험으로 인해 인생이 뒤집힌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서의 체험 후에 많은 시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생각했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임을 인정했을 것이며, 그 복음전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은 인생의 여정과 궤도를 이렇듯 심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죄 사함 받고 죽고 나서 천국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의무로,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체험으로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체험만이 그 사람의 인생의 질과 방향과 색깔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놓으신 변화가 있는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나의 이야기입니다”라고 나눌만한 “드러내심”(계시)가 나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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