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젊다면 죽음을 아직 실감하지 않을 거요. 아무리 젊다고 해도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실제로는 죽음과 상관없는 게 아니오. 죽음은 일상의 문제요. 오늘의 문명은 우리를 속이고 있소. 우리에게 죽음이 없는 것처럼, 거리가 먼 것처럼, 영원히 살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속이고 있소. 요즘 나는 죽는 순간의 느낌이 어떨지 종종 상상하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연습하는 것일 수도 있소. 사는 것도 벅찬데 죽음을 왜 준비하고 연습하느냐고 묻고 싶소? 그것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소.
죽음이 아주 가까워졌을 때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거요. 어렸을 때 함께 놀던 친구들, 함께 신앙 생활했던 교우들, 평생 함께 산 가족들에 대한 기억도 사라질 것이오. 잠에 빠져드는 느낌과 같을지 모르오. 지금 내 방은 세 면이 책이고, 한 면이 창문으로 되어 있소. 늘 내 곁에 있었던 책과 컴퓨터도 내 기억에서 사라질 거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던 주변의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는 순간이오. 아무도, 아무 것도 나와 함께 해 줄 수 없는 순간에,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순간에 기분이 어떻겠소? 그대는 절대고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죽는 순간에는 살아있는 동안에 열정을 기울였던 모든 것들이, 모든 사건들이, 모든 장면들이 한 밤이 꿈처럼 생각될 것 같소. 애착을 기울였던 것들도 시시해지는 거요. 여기에 예외가 없소. 집도, 통장도, 귀금속도, 사회적 지위도 모두 시시해지오. 무엇이 남소? 남는 것은 없소. 허무로 들어간다는 말이오? 그것은 개인에 따라서 다를 거요. 이 세상의 것에 과도하게 매달렸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순간에 깊은 허무의 늪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가질 거요.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볍게 여기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허무를 느낄 것도 없소. 잃을 것도 없으니 미련도 없는 거요.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하늘을 희망한다고 하오. 실제로 그럴 것 같소?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옆에서 직접 본 적이 있소? 나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아서 뭐라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은 못 되오. 개인에 따라서 크게 다를 거요. 대개는 혼미한 상태에서 정신을 잃게 될 거요.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수도 있소. 그런 상태에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잘 안 되오. 그냥 죽음과 싸울 뿐이오. 특별히 신앙적으로 훈련이 잘 된 사람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겠소. 자기의 죽음마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오. 훈련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다 그런 것은 아니오. 육체적인 고통이 심한 경우에는 훈련이 되었다고 해도 고통스럽게 죽소. 숨이 목구멍에서 막히는 순간에, 심장이 멈추는 순간에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없소. 그대도 죽음을 준비하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오. 죽은 사람처럼 사는 연습을 해보시오. 그럴 때 삶이 눈에 보일지 모르겠소. (2010년 9월16일, 목, 높아지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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