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42)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7. 4. 06:20

주기도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소위 영광송이오. 이 구절이 누가복음에는 없소. 고대 사본 중에서도 이 구절이 없는 사본이 제법 되오. 초기 교회가 처음에는 이 구절 없이 주기도를 사용하다가 주기도가 예배 순서와 연결되면서 이 구절을 삽입하게 된 것 같소. 오리지널 주기도에는 없었다는 말이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원래의 주기도에 없는 내용이지만 영광송을 포함시켜서 주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오. 영광송은 당시에 모든 기도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래서 예수님이 생략한 것일 수도 있소.

 

     이 마지막 영광송에 세 단어가 나오오. 나라(바실레이아), 권세(뒤나미스), 영광(독사)이오. 고대인들에게 나라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시오. 이스라엘 나라, 로마 나라, 이집트 나라가 있었소. 사람들은 나라에 속하오. 왕의 통치는 나라에서 절대적이오. 고대의 왕정은 나라를 왕의 소유라고 생각했소. 지금은 민중이, 즉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오. 그게 민주주의요. 여전히 대통령이 나라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도 있긴 하오. 주기도는 나라가 아버지에게 있다고 하오. 이런 기도는 왕의 목을 쳐야만 가능한 혁명이나 마찬가지요.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유를 알만 하오.

 

     고대사회에서 권세는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오. 생사여탈권을 왕이 쥐고 있었소. 초기 기독교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시오. 로마제국이 지중에 연안을 지배하고 있었소. 그들은 ‘팍스 로마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고의 군사력을 확보했소. 지금의 군작전 개념도 그 기초가 모두 로마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오. 말을 잘 듣는 식민지는 문화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었지만 거부하는 식민지는 쑥대밭을 만들었소. 고대 로마의 권세를 지금은 누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오? 지금도 모든 나라들이 이런 권세를 쥐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소. 초기 기독교는 그 권세가 아버지에게 속한다고 노래했소. 놀라운 발상이오. 세상 권세의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노래요. 로마가 기독교를 얼마나 껄끄럽게 생각했을지 상상이 가오?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혁명적 노래를 까맣게 잊어버렸소. 권세자들에게 아부하기 바쁘오. 권세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을 포기하고 말았소.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대는 잘 알 거요. 한 마디만 하리다. 지금 한국교회는 평화운동과 담을 쌓고 있소.

 

     영광은 헬라어 ‘독사’의 번역이오.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훈장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영광스럽다고 말하오. 그것이 명예이기는 하나 영광이라고 할 수는 없소. 왜냐하면 사법고시나 훈장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오. 그렇게 상대적인 것을 영광이라고 말할 수는 없소.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고 해도 영광을 얻을 수 없소. 다 지나가는 것이오. 그래도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오. 왕들이 대표적이오. 자신들에게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왕권에 온갖 장치를 마련하오.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은 불멸의 꿈도 꾸었소. 아무리 큰 명예를 획득해도 곧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이 가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을 거요. 결국 그들은 자신을 미라로 만들어서 피라미드 안에 매장했소. 그런 방식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오. 주기도를 드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왕들에게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주장한 거요. 왕을 영광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거요. 이 세상의 그 어떤 위치의 사람도 영광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이오. 주기도는 일종의 혁명가라 할 수 있소.

 

     주기도의 영광송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했소. 헨델의 칸타타 <메시아>에도 ‘영원히’가 반복되는 노래가 나오오. 영원하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소? 우리는 우리 삶이 한 순간이라는 사실만 알뿐이지 ‘영원히’라는 단어의 깊이를 알 수는 없소. 알이 새의 시간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소. 물속의 고기가 물 밖의 세계를 모르는 것과 같소. 동굴 안과 동굴 밖이 다른 것과 같소. 질적으로 다른 생명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속한다는 뜻이오. 초기 기독교는 애송이 시절부터 이렇게 우주론적인 차원에 속한 세계를 노래했소. 주기도에 영광송이 보충되었다는 것은 주기도가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찬송가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요. 주기도는 기도이며, 동시에 찬송이요. (2010년 8월31일, 화, 높은 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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