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4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7. 4. 06:15

-악-

 

     주기도의 실제적인 마지막 항목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요. 이 구절은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나오오. 누가복음이 이를 생략한 이유는 악 문제가 시험 문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요. 학자들도 악에 대한 진술이 시험에 대한 진술에 대한 후렴과 같다고 말하오. 그건 옳은 이야기요. 시험은 악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오. 물론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지만 그 경우에도 악이 활동하는 거요. 하나님이 악의 활동을 이용한다고 보면 되오. 악의 실체가 무엇이오?

 

    ‘악’은 ‘악한 자’라는 의미도 되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자이거나,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자이오. 앞에서 몇 번 거론한 마귀, 사탄이오. 성서는 그를 다르게도 표현하오. 악령, 귀신, 악한 권세라고 말이오.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악을 행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악에 의해서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기도 하오. 우리는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악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오. 그 중심에는 ‘악’이 자리하고 있소.

 

     우리는 앞에서 이 악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많이 했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말이오.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예를 들었소. 아담과 이브로 선악과를 취하게 한 뱀, 욥에게 재앙을 내린 사탄,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한 마귀, 등의 이야기요. 우리는 이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거요. 하나님이 왜 악의 활동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질문이오. 이것은 앞에서 잠간 언급한 신정론(神正論, Theodizee)에 대한 질문이오. 하인리히 오트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대답할 수 있소.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욥의 대답에서 이를 찾을 수 있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3,5) 궁극적인 고난과 재앙에 관한 대답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는 뜻이오. 둘째는 십자가 신학에서 제공하는 대답이오. 악과 고난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라고 말이오. 셋째는 부활신학에서 제공하는 대답이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무의미성이라는 무(無)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오. 넷째는 종말론적 대답인데,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오. 다섯째는 윤리적 대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악에 대항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오.

 

     위의 설명으로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신정론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오. 여기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없소.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말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어리오. 궁극적인 것 앞에서는 놀랄 뿐이지 더 이상의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오.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쉽게 설명해보리다. 악의 활동으로 인한 이유 없는 고난은 흡사 수술을 받고 있는 중환자의 경우와 비슷한 게 아니겠소? 지금은 고통으로 견딜 수 없지만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면 그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는 것처럼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종말의 순간이 되면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이오. 지금은 아무런 고난과 아픔 없이 사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날이 오면’ 여기서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요.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그 이전의 상대적인 세계가 별 큰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소. 이런 말로 지금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쉽게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오. 고난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은 따로 없으니 감수할 수밖에 없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할 세계가 오기 전의 중간시대(Zwischenzeit)를 살고 있으니 온갖 짐을 질 수 밖에 없소. 그러나 악에게 지지는 말아야 하오. 거기서 절망하지는 말아야 하오.

 

     신정론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악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소. 악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대답할 수 없소.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존재론적 세력이라는 사실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할 수 없소. 그런 세력이 여러 방식으로 성서에 묘사되어 있소. 지금도 그대로 활동하오. 아무래도 한 가지는 더 말해야겠소. 악은 뿔이 달린 괴물이 아니라오. 밖으로 흉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되오. 거꾸로 마귀는 세련된 모습으로 활동할 때가 많소. 아주 합리적이기도 하고, 실용적이기도 하고, 도덕군자 연하기도 하오. 이런 악을 거부하되 두려워 떨지는 마시오. 오스카 쿨만은 말하기를 마귀는 하나님의 줄에 매여 있다고 하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계 안에서만 우쭐댈 뿐이오. 쉽지 않겠지만 그대는 오히려 마귀를 조롱할 수 있으면 해 보시오. 그게 안 된다면 거들떠보지도 마시오. 그 녀석들은 날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에 불과하오. 악에 담대하게 맞서기 위해서라도 그대는 마귀를 줄로 제어하고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오. “악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2010년 8월30일, 월, 구름과 기습 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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