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사랑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극한 대립 속에 있는 의료계와 정부 위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시길 빕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립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두 단위 모두 자존심을 내세우며 힘을 겨루는 양상입니다. 양쪽 다 충분히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국민을 생각해서 한 발씩 양보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해결을 위한 진전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인간사는 요란하지만, 요즘의 자연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종 아침 출근길이나 저녁 퇴근길에 효창공원을 들릅니다. 여린 푸르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에 이 아름다운 봄날의 은총을 놓치지 말길 바랍니다.
1. 세계에서 제일 우울한 국가
얼마 전 미국 작가이자 유튜버인 마크 맨슨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를 여행했다’며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대한민국에 대한 영상을 올렸습니다. 맨슨은 한국은 불안, 우울증, 알코올 중독의 비율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높고 자살률도 높은데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이곳저곳을 방문하고, 여러 한국인을 만나 대화하고, 다양한 문화체험을 해본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나친 경쟁’이다. 잘하는 걸 더 잘하도록 강요하고 최고의 결과를 내기 위해 경쟁을 붙이는 방식이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이런 방식은 동족 간 전쟁 후 이념대립의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상대보다 우위를 점해야 했던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케이팝과 스포츠 분야와 대기업 운영 등에도 적용되어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맨슨은 한국의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형태에 대해서도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유교와 자본주의의 단점만 받아들였다. 유교의 가장 나쁜 부분인 수치심을 크게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신의 의견보다 타인의 판단을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유교의 가장 좋은 부분인 가족이나 주변 사람과의 친밀감을 중시하는 태도를 버렸다. 자본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나쁜 점인 물질 만능주의는 취하고, 자본주의의 좋은 점인 개인에 대한 존중은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맨슨의 분석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틀린 분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영상 중에 언급된 말 중 ‘한국은 압력이 일상화된 사회다’라는 말과 ‘한국사람들은 항상 실패의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가는 이가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늘 최선, 최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몰아가고,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몰아가면서도 늘 실패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가 너무 많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2003년부터 현재까지 OECD국가 중 1위입니다. OECD국가의 평균보다 두 배 가량 높습니다. 대한민국의 현재 상태는 극히 비정상 상태입니다. 연령별로 보았을 때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고 최근에는 10대20대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살률과 더불어 우울증과 공황장애 발생률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울증 발생률은 2,30대가 가장 높고, 공황장애 발생률은 사회적으로 실무책임을 많이 지고 있는 4,50대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은 조금씩 나타나는 양상은 달라도 모든 세대가 다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도한 경쟁, 승자독식,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기 어려운 한국사회는 K드라마 <오징어게임>과 상당히 닮았습니다. 그 드라마에 나오던 사람들은 상금을 독차지하기 위해 목숨 건 게임을 하며 다른 이의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드라마의 한 인물이 외쳤던 절규가 제게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2년 전 교회에서 20년 근속을 기념해서 장기 휴가를 받았을 때 어디를 갈까 고민했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니 유럽 자전거 투어를 갈까, 제주 한 달 살기를 해볼까,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까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그 긴 길을 걸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서로에게 꼭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이 길을 걷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새로운 숨, 나다운 숨, 깊고 자유로운 숨을 호흡하고 싶어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 국적과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이 ‘나도 그래서 왔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숨을 깊게 자유롭게 자기답게 호흡하고 계십니까?
2. 다른 숨
창세기에 의하면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그 안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갈 때 비로소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저 인간적 외형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닙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 그 숨으로 호흡하며 살아갈 때 인간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숨이 아닌 다른 숨을 호흡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높아질 수 있다고 말하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숨을 버리고 욕심이라는 숨을 호흡하자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따 먹었느냐 물으시니, 아담은 하와를 탓했고 하와는 뱀을 탓했습니다. 분명 최종 선택은 자기가 했건만 남을 원망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욕심이라는 숨에 원망이라는 숨을 더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숨을 잃어버리고 욕심과 원망을 호흡할 때 그곳이 어디든 그곳은 실낙원, 에덴의 동쪽이 됩니다. 삶은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홧김에 동생을 죽여 버렸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주신 숨을 잃어버리고 분노를 호흡하자 자신의 목숨처럼 귀하게 돌보아야 할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숨을 유지한다는 것, 다른 숨을 호흡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에스겔서에는 바벨론에 끌려가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혼 상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며 크게 좌절했습니다. 해방도, 다시 고국에 돌아가게 될 날도, 다시 하나님을 성전에서 예배하게 될 날도 꿈꾸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그런 꿈을 꾸기에는 바벨론 사람들이 내려치는 채찍이 너무 아팠고, 매일 감당해야 하는 노동은 너무 고되었습니다. 모두가 생기를 잃고 뼈만 남은 사람처럼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골짜기로 가셨습니다. 에스겔이 보니, 골짜기에는 마른 뼈가 가득했습니다. 나라의 멸망이라는 충격적인 고통과 노예살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겪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이의 뼈와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절망을 상징합니다. 바벨론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하루 절망을 깊게 호흡하며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로인해 제자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시면 자신들도 한 자리씩 차지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은 성전경비대에 붙잡히셨고, 대제사장과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셨고, 로마 병정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꿈꾸었던 제자들은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죽인 사람들이 자신들도 죽일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락방에 들어가 모든 문을 닫아걸고 숨어 지냈습니다. 문을 닫아 걸었다는 것은 그들이 외부와 교류를 차단하고 지냈다는 말인 동시에 그들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지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던 제자들이 이제는 좁은 방에 자신들을 가두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꾸었던 하나님나라에 대한 꿈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고픈 자를 먹이며 병든 자를 치유해 주고 죽은 자를 살리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작은 방에 갇혀 두려움을 호흡할 뿐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숨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절망을 호흡하며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쳤습니다.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러자 죽은 자의 뼈와 같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발로 일어나서 엄청나게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절망을 호흡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하나님이 주신 생기를 호흡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절망의 사람이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으로 향해 나아가는 소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미지의 땅, 그러나 약속이 있는 땅으로 나아가기 위해 옛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서 모여 두려움을 호흡하며 떨고 있던 제자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굳게 닫아 놓았던 문을 통과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하고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부탁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내가 하던 일, 우리가 하던 일을 계속 이어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을 호흡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을 호흡하며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숨을 호흡하며 또 한 명의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호흡하는 숨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숨을 놓칩니다. 하나님의 숨이 아닌 다른 숨을 쉽니다. 욕심, 원망, 분노, 절망, 두려움 등. 그런 숨을 호흡할 때 우리의 삶은 생기를 잃고 관계는 어그러지고 건강은 망가집니다. 제주 해녀들도 종종 물질을 하다가 죽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한 번 물질을 하러 바다 밑으로 들어가면 적당히 채취하고 물 위로 올라와 새로운 숨을 쉬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큰 전복이 보이면 그걸 힘들게 따려다가 올라갈 때를 놓쳐 질식사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올라갈 때를 놓쳐서 생긴 일이라기보다는 호흡하지 말아야 할 숨, 욕심을 호흡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호흡하고 있는 숨이 하나님의 숨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하나님의 숨을 선택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숨이 아닌 다른 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가르기도 합니다.
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매일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게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숨을 호흡하게 해 주십시오.’ 산티아고를 다녀와서도 저는 그 기도를 매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3:13의 말씀을 이용한 기도도 매일 드립니다. 고린도후서 3:13은 축도문에 근간이 된 말씀인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과 함께하시기를 비는 바울의 축복문입니다. 성령의 사귐의 사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교제, 친교, 사귐 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저는 성령과 우리의 사귐은 성령의 보호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기에 성령의 사귐을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저녁 그리고 낮에도 몇 번씩 삼위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깊게 호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게 마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마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쉽니다. 성령의 보호하심을 깊게 마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쉽니다. 그러면 제 안에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보호하심이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지고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최근에는 그 기도를 새롭게 확장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안을 채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보호하심이 나의 호흡을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4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쌓아놓은 숨과 호흡을 이 세상에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과 원망과 분노와 절망과 두려움을 호흡하면 그것은 고스란히 내 안에 쌓이게 되고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숨이 아닌 다른 숨을 우리 안에 쌓아 두지 맙시다. 하나님의 생명과 평화, 은혜와 사랑과 돌보심을 호흡하고 그 선하고 바른 것을 우리 안에 쌓으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존재 안에 갈무리해 놓은 하나님의 숨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며 삽시다. 지나친 경쟁과 두려움과 외로움에 짓눌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숨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주며 삽시다. 당신의 백성에게 언제나 성령의 호흡을 불어넣어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김재홍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릿고개의 성령강림 (막 2:23~28) / 김재홍목사 (0) | 2024.05.25 |
---|---|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요 9:30~34) / 김재홍목사 (0) | 2024.05.20 |
성전이 된 사람 (행 4:32~37) / 김재홍목사 (0) | 2024.05.09 |
버린 돌을 머릿돌로 (시 118:22-23) / 김재홍목사 (1) | 2024.05.02 |
서로의 품이 되어(요8:3~9) / 김재홍목사 (2) | 2024.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