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서로의 품이 되어(요8:3~9)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4. 27. 06:26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새로운 첫발을 떼는 청파공동체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내일모레면 어느덧 참사 10주기를 맞게 되는 세월호 유가족들 위에도 위로의 주님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 청파 신학


청파교회는 오랫동안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어를 예배당 전면에 걸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에 앞서 청파교회를 27년간 담임하셨던 박정오 목사님의 목회철학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저도 박 목사님을 5년 정도 직접 뵈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셨음에도 체격이 좋으시고 자세가 당당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던 어르신이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교회출석, 헌금과 같은 교회 내에서의 신앙보다 일상생활의 변화를 강조하셨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또 박 목사님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강직한 모습으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일상의 영성을 지향하는 신앙과 정의를 지향하는 신앙은 우리 청파교회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박정오 목사님을 이어 청파교회를 담임하셨던 김기석 목사님의 목회철학은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였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어와 함께 예배당 전면에 오랫동안 붙어있던 표어였습니다. 김 목사님은 1990년 부담임목사로 부임하던 해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서울에서 진행했던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 세계대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목사님은 일종의 생태학적 개종을 경험하셨습니다. 평화라는 가치와 생명이라는 가치가 단지 사회 환경 운동의 가치가 아니라 기독교신앙의 본질적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후 음식물 남기지 않기 운동, 청파 햇빛 발전소 설립, 몽골 은총의 숲 가꾸기와 같은 일들이 교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강조하는 신앙은 일상의 영성과 정의를 지향하는 신앙과 더불어 우리 청파교회의 귀중한 신앙 초석이 되었습니다.

• 표류하는 한국교회


오늘의 한국교회는 아픕니다. 날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인원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으며 선한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개신교인은 한 때 1,000만 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700만 명 대고, 그중에 200만 정도는 신앙은 유지하고 있지만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이고, 700만 중 10%는 이단입니다. 그런 중에도 교회는 계속 수적 성장의 시대를 그리워할 뿐 무엇을 놓쳐 사회의 외면을 받고 있는지 깊이 성찰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불법적 세습을 법을 바꾸어 합법으로 만든 후 이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교회건축을 한 후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목사는 ‘하나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말했지만, 그는 제대로 된 치리를 받지 않았고 버젓이 한국교회에서 큰 목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비상식적입니다.

신앙의 본을 잃어버리고 말을 붙잡은 결과입니다.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은 상식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이지 상식 이하의 그 어떤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영과 천국을 강조하다가 공중에 살짝 뜨게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으니 안정감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이라는 대지 위에 굳건하게 발을 딛고 서야 합니다. 우리가 가게 될 천국에 대한 소망만 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 위에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명도 품어야 합니다. 나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옳은 일을 행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몸을 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그간 무엇이 기독교가 아닌지, 그리고 무엇이 기독교인지를 힘껏 선포해 왔습니다. 우리는 계속 무엇이 기독교가 아닌지, 무엇이 기독교인지를 힘껏 선포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전보다 더욱 올바른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일에 몸을 써나갈 것입니다.

• 몸으로 행하는 하나님의 뜻


신앙이 영적인 믿음이나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몸의 실천으로까지 이어져야 참된 신앙입니다. 신앙하면 영혼과 마음의 일이요 몸의 일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큰 병폐 중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7:21~23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거라.’” 예언, 축귀, 기적 모두 영적인 일입니다. 그것도 영적 수준이 높은 이만이 할 수 있는 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높은 수준의 영적인 행위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오히려 그런 영적인 일에만 몰두할 뿐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인 일 – 하나님의 뜻을 행함 = 불법’ 놀라운 도식입니다. 한국교회가 꼭 기억해야 할 도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몸으로 행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 납니다. 제가 복음서의 말씀 중 유난히 좋아하는 세 구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불러모아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우셨습니다. 그 둘을 나눈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대했느냐 였습니다.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해 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가 주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과 심판이 갈렸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나그네를 영접해 주는 것, 헐벗은 이를 입혀 주는 것, 병든 자를 돌보아 주는 것, 갇힌 자를 찾아가는 것. 이 모두는 몸에 대한 것입니다. 어려운 이를 위해 내 것을 내어주거나, 나의 몸을 쓰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이를 돕기 위해 나의 것과 나의 몸을 쓰는 것을 도리, 바른 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구원, 생명 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모두를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길을 지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그를 치료해 주고, 자기의 노새에 태워 여관에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이 두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자기를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다가오느냐 아니냐는 ‘죽느냐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워 놓고 말합니다. “율법에는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다 저렇다 말씀 없이 몸을 굽혀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이 아무 답을 하지 않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답을 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몸을 일으켜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구원의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를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새번역이 더 적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여인 가까운 곳에 앉으셨을 것입니다. 여인 가까이에 앉아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은 ‘나에게도 돌을 던지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몸을 누군가 위해 움직이고 사용할 때 우리의 몸은 품이 됩니다. 하나님의 품이 됩니다. 이 땅에 이루어진 작은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몸을 품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떠오르는 시입니다. 시가 있고 노래 가사 버전이 있는데 노래 가사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삶이란 나 아닌 다른 이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싸늘해지는 가을 녘에서 이듬해 봄 눈 녹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 그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히 남는 게 두려워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려하지 못했나보다
하지만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아침에
나 아닌 다른 이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나는 만들고 싶다

‘청청’이라고 부르는 청파교회 청년부는 다음과 같은 공동 축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예수님, 친구 되신 성령님, 예배를 드리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청청의 젊은이들과 함께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품이 되어 주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품이 되어 살게 해 주십시오.” 우리 청파,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시다. 이 땅에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품이 되어 주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품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청파의 모든 교우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품을 만들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