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성전이 된 사람 (행 4:32~37)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5. 9. 07:03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설립 116주년을 맞은 청파교회와 어린이 날을 맞은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 특별히 몹시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저 북녘의 어린이들 위에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 1908년 청파교회가 세워지다


116주년. 참 오래되었습니다. 1908년 당시 청파동은 빈민들이 살던 동네였습니다. 1925년에 발표된 나도향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는 청파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청파동은 빈민굴, 지저분한 촌락,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상동교회는 그런 가난한 동네에 양우로더 여사와 이필주 전도사를 복음 전도자로 보내 교회를 세우게 했습니다. 연화봉 부근에 세운 교회라 하여 연화봉교회라 이름하였습니다. 이필주 전도사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7년 봄에 청파에 기도방이 설립되니 나는 저녁마다 한서를 불고하고 다니며 전도하여 마침내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필주 전도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여기서 ‘한서를 불고하고’는 ‘추위와 더위를 개의치 않고’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연화봉교회의 실질적 설립자였던 양우로더 여사는 교회와 더불어 여학교를 세웠는데 교회와 학교 운영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이들이 추위와 더위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헐어가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연화봉교회는 그렇게 전도자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연화봉교회는 설립 5년만에 교인이 300명으로 늘어났고, 사촌리와 갈월리 두 곳에 지교회를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청파교회의 설립의 역사를 살펴보면 꼭 사도행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 초대교회의 전도자, 바나바


오늘의 성경본문은 초대교회와 전도자 바나바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말씀을 힘 있게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던 것처럼 사도들 앞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상이 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 삭개오도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만, 사도들이 세운 교회에서는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36절과 37절에는 바나바의 경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바나바 요셉은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도들이 요셉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사람들을 잘 위로하던 사람, 교회내의 갈등과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별명은 한 번의 행동이나 하나의 사건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특별한 존재성을 주변 사람들이 여러 번 반복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에 걸맞는 별명을 붙여 줍니다. 오늘의 본문 에서는 바나바가 큰 재산을 희사한 일이 나오지만 그 일 하나 때문에 그가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행했던 일 중 가장 큰일은 밭을 팔아 희사한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정말 큰일을 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교회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겁니다. 바나나는 뛰어난 복음 전도자, 바울을 교회공동체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바울은 다메섹 회심 이후에 7,8년 동안 고향 길리기아 다소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회심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던 교회 공동체에게 바울은 여전히 원수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둘을 만나게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초대교회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원보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원수 같이 여기던 바울도 바나바가 소개하니 바울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인품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후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바나바는 12사도는 아니었지만 자기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 나라 사역에 바쳤습니다. 바울과 함께 오늘의 튀르키예 지역 곳곳을 다니면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안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함께 전도 여행 중이었던 바나바의 조카 마가가 갑자기 전도여행을 중도에 포기하고 먼저 이스라엘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크게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나중에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이후 다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바나바는 마가를 동행시키려 했지만, 바울이 완강하게 반대함으로 전도여행단은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지난 후에 바울은 마가를 다시 가깝게 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도 삼촌 바나바의 역할이 있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바나바, 그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저작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람들은 바나바에 대한 기록을 여기저기에 남겼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사람들이 바나바에게서 잊을 수 없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이 성전을 허물라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왕이 세웠기에 헤롯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헤롯은 기원전 19년에 자신을 새로운 솔로몬이라 지칭하며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번영하고 있으며 로마와 우호적 친선관계에 있으니 전지전능하신 신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성전건축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성전건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 활동 당시에도 헤롯성전은 건축 중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보다 서너 배나 컸고, 곳곳에 금박을 덧입혀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면 성전은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났고 사람들은 눈이 부쳐 성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야만 했습니다.

헤롯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성전이었습니다. 헤롯 성전에서는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월절이면 수십만 마리의 어린양이 제물로 희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화려하게 드러난 겉모습과는 달리 예루살렘 성전의 이면은 어두웠습니다. 사람들은 제사장이 제사용으로 인증한 소와 양과 비둘기를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사야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성전세를 내기 위해 세겔로 돈을 환전해야 했습니다. 그 차익금과 수수료는 제사장들에게로 들어갔고, 제사장에게 들어간 돈은 다시 헤롯에게로 들어갔고, 헤롯에게 들어간 돈은 다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헤롯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고의 성전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나님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던 최대의 종교 마켓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그리곤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말씀과 예배를 위한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그와 같은 것이 실은 종교권력자들과 그들과 결탁된 불의한 체제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탐욕이 가득 찬 성전은 허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바른 기능을 상실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성전을 허물면 당신께서 사흘만에 성전다운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 이후 사흘만에 부활하실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미 예수님은 참된 성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아픔을 치유받고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습니다. 부패할 대로 부패했던 헤롯 성전은 헤롯이 그토록 의지하던 로마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튀르키예와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 성전이 된 사람


어느 사회 현장에서 신부님들이 집례하시던 미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사회적 약자라 사람들도 언론들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던 이들을 위해 몇 년간 매주 미사를 드려오던 신부님들이었습니다. 미사 후 신부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신부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신부가 길 위에서 성찬을 집례하면 그곳을 교회로 인정해 줍니다.” 이 말은 신부의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좋은 뜻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만한 일을 하는 한 사람이 있는 곳이 교회다, 그 한 사람이 교회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성전이 된 한 사람 위에 당신의 교회와 성전을 세우신다, 라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우리 청파교회가 세워졌던 1908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대성당>이라 일컬어지는 조각 작품입니다. 얼마 전에 출간된 김기석 목사님의 새 책 <고백의 언어들>의 표지에도 <대성당> 사진이 들어갔습니다. 얼핏 보면 기도하려고 두 손을 모으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두 손은 모두 오른 손입니다. 한 사람의 손이 아니라 두 사람의 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오른 손을 맞잡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긴 손가락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 채 수직으로 서 있습니다. 함께 함, 하나 됨, 하늘을 향함 등이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댕의 이 <대성당> 조각은 본디 분수 장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처음 정한 작품명도 <대성당>이 아니라 <언약의 궤>였다고 합니다. 두 손 사이로 분수가 나오는 광경도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궤>라는 이름도 괜찮아 보입니다. 로댕이 만든 두 손은 언약궤 위에 올려졌던 그룹들이 두 날개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주는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언약궤 위에 올려졌던 그룹들은 속죄판 혹은 시은소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성전, 참된 교회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손을 마주잡기 위해 다가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와 내가 하나 됨을 지향할 때, 함께 하늘을 지향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두 손이 서로를 마주잡을 때 그 속에서 생명수가 솟아나고, 그 공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공간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의 손이 그런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심으로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늘에 속한 존재, 하나님의 자녀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생명수를 마셨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바나바도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바나바의 손을 생각해 봅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지고 가 손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가난한 자도 자기가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의 원수 같은 이 바울을 찾아가 손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최악의 원수는 최고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가서 손을 펼치는 곳마다 사람들은 화해했고 하나됨을 느꼈고 함께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 그는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랬기에 바나바는 자기 이름으로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초대교회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자 성경 곳곳에 그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내게 찾아와 나를 자신처럼 소중히 여겨 주고, 나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고, 땅만 바라보며 살던 나로 하늘을 바라보게 해 주고,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청파교회의 교인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각자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한 명 한 명이 청파파송교회입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청파파송교회여야 합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아픔을 향해 나아갑시다. 그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줍시다. 나 혼자만 하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늘을 지향합시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누군가와 함께할 때 주님께서 그곳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며 그 자리에 임재하실 것이며, 그 위에 당신의 성전을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와 성전이 되어 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116년 전 그 마음으로 이 땅의 가난한 민초들에게 성전이 되어 주었던 청파의 전도자들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다가가 하나의 성전이 되어주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