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21-22절: 생명 존중의 뜻
사역:
“너희는 들었다. 옛 조상들이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법정에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배웠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형제자매에게 분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지방 법정에 넘겨질 만하고, 자기의 형제자매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최고 법정에 넘겨질 만하며, 그들을 악마화 시키는 사람은 지옥불에 던져질 만하다.”
해설과 묵상:
앞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오신 것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가르침은 율법을 폐기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태는 율법에 대해 예수님이 주신 여섯 개의 말씀을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들었다”는 말씀으로 먼저 율법의 가르침을 소개한 후에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말로써 당신의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을 ‘여섯 반제’(Six Antitheses)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 명제로서 당신의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 겉으로 보면 ‘반대‘ 명제로 보이지만 실은 그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첫째 예는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 금지령(출 20:13)입니다. 살인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는 행위입니다. 출애굽기 21장에는 다양한 유형의 살인죄에 대한 형량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살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는 일급 살인의 경우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게 규정합니다.
살인 금지의 규정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욥 1:21). 따라서 생명을 해치는 일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는 일도 그렇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목숨을 해치지 말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율법과 마찬가지로, 살인 금지의 계명은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마지노 선을 그은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때로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 폭행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목숨을 해치는 데까지 가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법의 속성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최소한으로 줄여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최소한의 규정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소한의 규정이 제시하는 최대한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살인 금지 계명에 대해 웬만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 없다”고 판정 받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은 예외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살인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살인 금지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밝히십니다. “자기 형제자매”는 족보 상의 형제자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형제자매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을 모신 형제자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가지 예를 점층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첫째, 분노를 품는 행동입니다. 어떤 상황을 당하여 화를 느끼는 것은 인성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분노를 품는 것은 마음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분노가 자라서 육체적인 폭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만으로도 지방 법정에 넘겨질 만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를 마음에 품는 것도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직역하면 “형제자매에게 ‘라카’라고 부르는”이 됩니다. 아람어 ‘라카’는 ‘바보’ 혹은 ‘멍청이’라는 욕설입니다. 이 욕설은 그 사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 가치를 부여 하셨습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조건에 상관 없이 모두를 절대적 가치로 존중해야 합니다. 천부적 가치를 부정하고 그 사람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 당하는 것만큼 상처가 되는 것이 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를 범하는 사람은 산헤드린 즉 최고 법정에 넘겨질 만하다고 하십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행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직역하면 “형제자매에게 ‘모레’라고 부르는”이 됩니다. ‘모레’ 역시 아람어 욕설인데, 이것은 ‘라카’보다 정도가 심한 욕설입니다. ‘라카’가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야”라는 뜻이라면, ‘모레’는 “너는 세상의 악이야”라는 뜻입니다.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그 사람을 악마화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를 범하는 사람은 지옥불에 넘겨질 만하다고 하십니다.
살인 금지 계명을 두고 ‘나는 하나님 앞에 떳떳해’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수 없이 그르치고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함으로 혹은 다른 사람을 악마화 시키는 것으로 수 없이 살인죄를 저질러 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형식주의에 치우쳐 최소한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제자는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만나는 모든 생명들을 하나님이 부여하신 절대 가치로 대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기를 힘씁니다. 그렇기에 제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의에 있어서 더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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