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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서 5장 23-26절: 용서와 화해

새벽지기1 2023. 10. 22. 06:42

마태복음서 5장 23-26절: 용서와 화해 

사역:

“그러므로 네가 제물을 가지고 제단으로 가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어떤 일로 너에게 척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내려 놓고 먼저 가서 그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렇게 행한 다음에 돌아가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같이 법정으로 가고 있다면, 그곳에 당도하기 전에 급히 그 사람과 화해하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그 부하에게 넘겨주어 너를 감옥에 집어 넣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일전까지 갚기 전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해설과 묵상:

예수님은 두 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첫쨰는 제사 드리는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23-24절). 

이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너의 형제”라고 표현하십니다. 피를 나누었던 아니든,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모두 그분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한 분 하늘 아버지를 모신 형제 자매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첫번째 조건입니다.

 

“네 형제나 자매가 어떤 일로 너에게 척지고 있다”는 말은 자신의 언행으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거나 분노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분노를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생각이 나면 얼른 그 자리에 제물을 놓아 두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분노를 품고 있으면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벽이 생겨서 영적으로 쇠약해집니다. 

 

따라서 제사나 예배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면밀히 돌아 보아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는지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니 늘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지만, 예배 드리기 전에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자격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안다면, 그분의 뜻에 따라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서기에 크게 가책되는 어떤 일이 있다면, 예배를 드리러 가기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그것이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자녀 삼으셨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게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듯,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그러하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 된 자아는 끝까지 자신이 옳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대로,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고소하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상황을 예로 드십니다(25-26절). 이것은 앞의 경우보다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피해 입은 사람이 피해 입힌 사람을 붙잡아 법정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법정에 이르기 전에 용서를 받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법정에 넘겨지면 법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행한 죄값을 법대로 치러야 합니다. 

고소 당한 사람도 그렇지만, 고소한 사람도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비록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았지만 상대방이 진실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하지만 피해 입힌 사람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법정에 넘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 이르기 전, 아직 길 위에 있을 때”라는 말은 살아 있는 동안을 말합니다. 법정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의미하고, 감옥은 지옥을 가리킵니다. 법정에 넘겨지면 법대로 모든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것처럼, 마지막 심판대에 넘겨지면 하나님의 법대로 심판을 받고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법대로 심판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 받아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심판대에 넘겨지고 영원한 죽음 속에 내던져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일전까지 갚기 전에는 거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강조점은 뒷부분에 있습니다. 갚아야 할 빚이 너무나 커서 결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 18:23-35)가 생각이 납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그토록 많은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오늘의 가치로 수조 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입니다. 수백 번을 다시 살아도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지옥에 던져지면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일한 대안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빚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법이 정하는 죄값을 다 치룰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값을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죄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해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이 길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는 일은 당장, 서둘러 할 일입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어느덧 법정에 서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