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요 17:1~5)

새벽지기1 2022. 12. 1. 07:20

(2022/11/20, 창조절 제12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 세 가지 직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이끌어주신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 애쓰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영원한 중심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이 갈마드는 인생길을 걷는 동안 주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허방다리 위를 걷는 것처럼 삶이 위태롭다 느낄 때마다 제가 떠올리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 37:23-24). 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었다고 자부할 순 없어도, 어쩌다 비틀거려도 우리 손을 잡아 주시는 주님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을 교회 전통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가 걸어온 시간의 종국이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구유를 요람 삼아 태어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신 주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의 삼중적 직무에 대해 말합니다.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가 그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존재인 예언자는 권력자들과 백성들의 불의를 준엄하게 꾸짖는 사람인 동시에 연약한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 속에 희망의 불꽃을 점화시키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이셨습니다.

“제사장은 무너져 버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며, 손상된 관계를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가운데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김기철 옮김, 복 있는 사람, p.36-40 참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다리를 당신의 몸으로 연결하셨고, 도저히 만날 수 없다고 여기던 이들로 하여금 하나됨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또 다른 직무인 왕은 힘으로 지배하는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신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마침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빌 2:9-11). 주님은 인류의 역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그 왕은 사랑의 왕입니다.

• 때에 대한 자각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에서 예수님은 지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저는 이 구절들 속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만 이해해도 우리 삶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3장 1절을 읽을 때마다 깊이 감동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 사랑이 지금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16장 말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빛을 싫어하듯이, 음습한 욕망과 죄악에 사로잡힌 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토대를 뒤흔드는 이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겪게 될 시련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누군가에게 미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진리의 길을 가려는 이들은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미움 받는 것이 싫어서 자꾸 진실을 회피할 때 우리 영혼은 점점 파리해져 갑니다. 간디가 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제자들에게 닥쳐올 환난을 내다보며 주님이 하신 말씀은 얼마나 담대합니까.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b). ‘때’(hōra)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때’에 대한 진술이 자주 등장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귀띔 하자 주님은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 2:4)라고 말합니다. 초막절에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라고 권하자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요 7:6)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마침내 ‘내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내심을 받은 이로서의 예수님의 때는 임무를 완수하고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그 때는 죽음의 때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입니다. 고난과 영광이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때를 앞당기려고 조바심치지도 않았고 그 때를 회피하려고 도망치지도 않으십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셨을 뿐입니다. 자기 때를 분별하며 그 때에 맞는 삶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이 시는 “주여, 때가 왔습니다./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시인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마지막 과일이 무르익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 시간은 과일이 완성되는 시간이고, 독한 포도주에 단맛이 스며드는 시간입니다. 쇠락의 시간을 성숙의 시간으로 바꾸려는 몸부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의 끝에 서서 하나님께 청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 이 말은 당신을 높여달라는 청이 아닙니다. 달려갈 길 다 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용기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꿈의 좌절이나 패배가 아니라 생의 완성으로 삼으려 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영광입니다.

• 영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보냄을 받은 존재인 예수님에게 죽음은 보내신 분에게로 귀환입니다. 귀환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맡기신 일을 온전히 수행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위임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는 남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권력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사람들은 영생을 흔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생은 완전히 다른 시간 체험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 속에 녹아들어가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일상적 시간 속에 뚫고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사랑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영생을 맛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이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의 존재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그분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따스함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던 얼음, 즉 자기애라는 얼음, 이기심이라는 얼음, 열등감이라는 얼음, 두려움이라는 얼음, 무정함이라는 얼음, 원망이라는 얼음, 증오심이라는 얼음을 녹였습니다. 봄이 되면 눈석임물이 흘러 내려 생명을 깨우듯,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은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영생이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우리는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합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를 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애’라는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줍니다.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더 나아가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사는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사소한 차이를 못 견뎌 부르르 떨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종교는 자기애를 강화하도록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미혹된 영혼들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알고 다른 이들을 멸시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내면의 우상숭배(즉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을 숭배하는 것)가 사회적 결과로 드러난 것”(랭던 길키, <산둥수용소>, 이선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p.455에서 재인용)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신하는 이들입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 더 큰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기


주님은 떳떳한 삶을 사셨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람들이 영생을 누리도록 하셨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삶을 통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하며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우상이 된 종교 지도자들의 허물을 가리는 덮개 구실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화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느끼게 만드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현대세계는 불교가 말하는 삼독三毒, 즉 탐진치貪瞋痴를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소비사회는 과도한 욕심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부추깁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이 지배하는 곳은 적대적 공간입니다. 제로섬 게임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내 몫을 늘리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몫을 빼앗아야 합니다. 경쟁이 일상입니다. 느긋한 평화와 기쁨이 없습니다. 욕구와 성취 사이의 갭이 커지면서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분노 조절 장애를 겪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사람들이 다 화가 난 것처럼 보입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지만 사람들은 어리석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삶을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복잡해졌습니다. 시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정말 중요한 일들을 소홀히 하며 삽니다. 가족 간의 유대가 느슨해지고, 우정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지도 못하고, 아름다움을 향유하지도 못합니다. 삶이 분주할수록 외로움과 좌절감이 늘어납니다.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기적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지러운 속도에 적응하느라 허둥거립니다. 정치와 경제가 우리 삶을 과잉 대표하면서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되어 있습니다. 따뜻한 말, 격려하는 말이 사라지고 저주하는 말, 조롱하는 말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여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고, 덧없는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이 영생을 맛보도록 돕고,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환대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것,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더 이상 불의한 이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에 집중할 때 우리 삶은 단순해집니다. 이틀만 더 남극의 태양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던 시인처럼 우리 또한 선물로 주어진 시간을 무르익음의 시간으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