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양한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로 이뤄집니다. 의식주에 필요한 것,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관계의 필요, 보호와 안전, 사랑과 인정, 그리고 지적필요도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욕구와 필요의 중심에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요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절박할 때나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필요입니다. 그러나 그 필요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고대로부터 인간들이 나름 열심히 찾은 것이 점을 치거나 주문을 외우거나 제물이나 굿과 같은 것들인데, 그러나 이것들은 행하면 행할수록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분과 만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430년 간 이집트 노예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첫 수업은 ‘성막’을 세우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고, 하나님과 백성들을 중재하는 임무를 제사장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는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다리 역할을 맡은 제사장들은 안타깝게도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종교 국가 이스라엘에서 대제사장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고, 비례하여 점점 더 타락하면서 이스라엘을 식민지 삼았던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정부와 대제사장직을 거래하거나 최고 가격을 제시하는 후보자에게 그 직책이 주어졌습니다. 대제사장직은 더 이상 하나님과 백성들을 중재하는 자리가 아니라 통치와 권력의 자리로 변질되었고 그 변질은 결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주후 18년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 철저히 로마화 된 그는 부와 권력을 향유하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종교 장사를 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는 어느 대제사장보다 세속적으로 정치적으로 유능하여 18년 동안이나 그 직을 유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소망을 주어야 할 종교마저 철저히 부패하여 불쌍한 백성들을 갈취하는 상황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러 왔지만 예수님은 죽으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은 신학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종교가 아닌 현실과 삶에 뿌리박고 있는 살아있는 영성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이 연일 선포되었지만 이스라엘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자신을 내세우며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통제하고, 하나님의 일과 백성들의 구원을 스스로 관리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가야바와 같은 나쁜 제사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하였습니다. 이제는 가야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헤롯과 가야바는 정치와 종교분야의 수장이지만 자신을 내세우고 기득권을 강화하려 할 때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자신을 내세우려 할 때, 이득을 챙기려 할 때,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 때, 화가 날 때, 미워하고 복수하려 할 때, 정신없이 세상일이나 쾌락에 몰두할 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단순히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가야바와 같은 사람이 지배하는 종교에서 말씀과 기도는 형식이 되고, 외형과 사업과 쇼와 영향력만이 판치게 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에 환멸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토록 부패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셨고, 사람들과 죄인들과 어울리셨다는 점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보다 더 영적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홀로 침잠하는 영성은 아주 빠르게 주관적이 되며 때로는 심각한 문제에 빠져 한 세대 이상 존속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과 율법과 유대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임무를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시고 교회가 태동되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일을 계승한 주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성경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요 11:52)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다.”(벧전 2:9)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교회,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는 교회로 만들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야바 대신 우리들의 대제사장이 되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좋은 제사장이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여 듣게 하고, 그분 뜻에 따라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목사가 죽고, 교인이 죽고, 교회가 죽는다는 것은 성장과 성공의 개념 자체를 지워버리고, 진정을 다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한 경청하고, 전심을 다하여 기도와 찬양을 올리고,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리십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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