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오셔서 로마와 독재 왕권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셨다는 소문이 온 이스라엘 땅에 퍼졌습니다.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거리로 뛰어 나와 외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왕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이 온통 난리법석으로 들끓고 있을 때, 유일하게 묵묵히 자기 일을 했던 것은 예수님을 태우고 가던 어린 나귀뿐입니다. 예수님은 왜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요? 이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을 실현하시기 위해, 곧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환호하고, 아우성치고, 희희낙락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셨고, 어린 나귀는 그 예수님을 태우고 고개를 숙인 채 또각또각 갔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자기 존중감을 심어주어 우리를 자기다워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정은 인생초기에나 필요한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반드시 심리적인 독립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남들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 소신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숙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행여 비판이라도 받게 되면 그 불안은 점점 증폭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나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어니스트 베커는 그의 저서 ‘죽음의 부정’에서 그 원인을 깊고도 명쾌하게 설명해줍니다. 사람들의 공포의 근원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들은 알고 보면 모두 ‘이제는 살겠구나.’하는 환호와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한 가장 흔히 쓰는 전략 중 하나는 ‘대리 권력자에게 빌붙는 것’입니다. 대리 영웅을 만들어 자기 짐을 넘기고 그 곁에 껌처럼 붙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내세운 대리 영웅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대리 영웅이 잘못한 줄 알면서도 그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지게 되므로 목숨을 다해 옹위합니다. 그렇게 대리영웅에 의해 일희일비하다가 끝내는 ‘전이공포’에 떨며 대리 영웅과 함께 몰락합니다.
예수님을 대리 영웅으로 따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신중의 신,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다는 이유로 타종교나 세상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 역시 같은 오해에서 비롯된 추악한 행태들입니다. 예수님은 영웅이 아니십니다. 군림과 지배와는 가장 거리가 먼 분이십니다.
헤르만 헷세의 ‘동방 순례’에 예수님의 본질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인공(H.H)과 일군의 남자들이 깨달음을 찾아 순례 길에 오릅니다. 일행 중에 레오라는 하인은 식사 준비나 허드렛일을 하였고, 저녁이 되면 노래를 불러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곤 하였습니다. 몇 해에 걸친 여행에서 많은 난관에 봉착하곤 했지만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 이후 순례 단은 혼란에 빠지고 주인공은 거의 죽을 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하인 레오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인공은 레오를 찾아 몇 년을 헤맨 끝에 레오를 만나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짐꾼이자 하인으로 알고 있던 레오가 사실은 최고 지도자이자 인도하는 영(The Guiding Spirit), 위대하고 고귀한 리더였던 것입니다.
로버트 그린리프는 헷세의 동방순례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리더로서의 하인’이라는 책에서 ‘서번트 리더십’을 제창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종으로서의 리더’이시며, 우리더러 그렇게 되라고 하십니다. 흔히 리더가 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조셉 자보르스키의 ‘리더란 무엇인가’를 보면 우리들은 각각 따로 떨어진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하나가 뭘 어쩐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끈끈한 액체인 글리세린이 담긴 투명한 통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잉크는 글리세린 위에 떠 있습니다. 그 통을 돌리면 잉크가 글리세린에 천천히 퍼져 나가고 마침내 푸른색 글리세린이 됩니다. 그 통을 반대로 돌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퍼져나갔던 그 길을 따라 잉크가 다시 모여들어 원래 위치로 돌아갑니다. 이 실험은 우리들이 각각 흩어진 모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온 우주와도 서로 통한다는 뜻이며, 작은 잉크 한 방울도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거룩함을 입은 우리들이 생명과 능력과 거룩함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참 생명의 일,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행할 때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내셔서 그 일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십니다. 세상의 변화는 잉크 한 방울과 같은 한 사람에서 비롯된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작은 그리스도라 부르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형제요 친구라 부르시기에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일은 겉만 요란한 가짜들입니다. 진짜 일은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들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20세기 예언자로 칭송받는 마르틴 부버가 말합니다. “사물과 본능의 지배를 받는 자유롭지 못한 빈약한 의지를 버리고 위대한 의지를 따라야 한다. 그 때 위대한 의지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생명의 일을 하노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와서 돕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사람들은 하나님의 증인이요, 예수님의 친구라 부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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