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늘

새벽지기1 2021. 2. 13. 07:35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봅니다. 사주팔자나 손금, 관상 등을 봅니다. 별자리를 보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신문에는 ‘오늘의 운세’가 실립니다. 모두 다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쳐 액운을 피하고 행운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미신이라며 멀리합니다. 그런데 방언과 치유 등 은사를 강조하는 교회에 다녔던 분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의 믿음을 좋은 것이라고 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나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예언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모두 미래의 길흉화복에 대한 것들입니다.

사주팔자나 손금을 보는 것은 미신이고 예언기도를 통해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괜찮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똑같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탄식하며 말합니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킨다는 것은 곧 길흉화복을 점쳐보는 것으로, 이는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이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다시 귀신이나 특정 사람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신앙이란 하나님을 잘 섬겨 길흉화복을 남보다 먼저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길흉화복을 하나님의 처사로 알고 참고, 견디고,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에 대해 잘 설명해줍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가난과 핍박과 비천에서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게 하시고, 높고 풍성한 자리에서도 겸손하고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요동치 아니하고, 맡은 일을 주께 하듯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점치지 않습니다. 그저 순종할 따름입니다. 흉과 화는 피하려 하고 길과 복만 찾는 사람들은 자연히 길흉화복에 휘둘리는 인생을 살게 되고, 성장과 성숙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 최악의 타락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이상하면서도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4-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神)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이해하고,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당연히 길흉화복을 점쳐준다는 귀신이나 특정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라는 말씀은 시편 82편 6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지존자의 자녀들이자 神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는”(시 82:3-4)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일은, 꿈이나 계시로 길흉화복을 점쳐 액운을 피하고 복만 누리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사랑과 정의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정의의 선한 일에, 반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는 망각하고 그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척 예의만 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슬프게도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전통과 관습, 즉 예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거리의 여자나 세리 등 당시 천하게 여겼던 최하층 사람들과 기꺼이 함께 하셨고, 죗값으로 병에 걸렸다며 따돌림 당한 병자들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요 10:37-3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 즉 소외되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엄청난 뜻입니다. 무신론 실존주의 작가 까뮈가 말합니다. “너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주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대로, 무신론자인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가련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가르쳐 달라는 간청의 말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최고 신학자로 꼽히는 바르트는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이요 불신앙이다.’라고 단언합니다. 복음,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지 아니하고 종교행위로 바꾸어 하나님을 조작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한 것이 기독교의 최대 실패입니다. 종교의 최대 폐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특정인들의 신비, 영험, 초월 등의 경험을 절대화 하여, 사람들을 오도 내지 미혹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종교의 폐단을 격파하고, 오도되어 눈이 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올바로 깨닫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 성경에서 말하는 영성은 종교에 뿌리박은 영성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 현실에 뿌리 내린 영성입니다.

요즈음 연일 ‘갑질’하는 사람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좋은 세상이 어렵더라도, 천천히 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이런 일 대신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모두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워도 서로 격려하며 함께 선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형통한 삶을 보장하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우리들은 그분의 지체입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징조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받으셨고, 모든 시간을 묵묵히 살리는 일에 쓰셨습니다. 당연히 그분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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