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지금 울리는 북소리

새벽지기1 2021. 2. 11. 08:01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ㆍ이삭의 하나님ㆍ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삭에게는 ‘소망의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립니다. 그런가 하면 네 명의 부인에게서 열두 아들을 낳은 야곱은 가히 ‘사랑의 사람’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 인물 중에서 야곱을 선호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역사상 본격적인 하나의 민족으로 등장할 때 선택한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뜻)은 알다시피 야곱의 별명입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축복’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다산의 축복ㆍ물질의 축복ㆍ영의 축복 등 모든 복을 고루 누렸습니다.

종교성이 원시적이고 미신적일수록 ‘축복’에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이때의 축복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에 더하여, 내세에서 영광 누리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종교성과 축복의 연관관계에 들어맞지를 않습니다. 나아가 그 연결고리를 끊고 종교성의 새 차원을 열어젖혔습니다. 다른 말로,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게 믿음이 아니고, 고난 받는 종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믿음이라고 몸소 보여주신 셈입니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은 가르치지 않고, ‘거래하는 신앙’만 가르친 데 있지 않을까요? 이런 맥락에서 새삼 아브라함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불린 데는 반드시 깊은 사연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 끄트머리에 보면, 아브라함 가문은 아주 오랜 세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나고 자라, 그에 익숙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라는 고대 지명이 그 단서입니다. 우르(Ur)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도(古都)로, 수메르 문명과 바빌로니아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가장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나고, 자라 그에 익숙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동안 익숙하게 몸담고 있던 문명에서 빠져나왔기에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역사의 뿌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모세의 경우는 어떤가요? 40년 간 그가 몸담았던 문명은 이집트의 물질문명입니다. 당시 세계 역사를 쥐락펴락하던 강대국 이집트에서 그것도 왕자의 신분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 문명에서 ‘나오라’ 명하셨습니다. 게다가 모세 혼자가 아니라, 그 문명에 길들여져 있던 노예들까지 다 데리고 나오라는 엄청난 숙제를 떠안기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 백성은 가나안 문명과 하나가 되면 안 되었습니다. ‘선민’(選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고 해서, 로마 문명과 한통속이 되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선민’이기 때문입니다. <월든>의 작가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두가 발을 맞추어 나란히 행진하고 있는데, 대열에서 벗어나 딴 길로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요. ‘선민’의 책무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름지기 ‘선민’, 선택된 백성이란 세상의 북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북소리를 듣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7장 24절 이하에 보면,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시리아-페니키아) 여인입니다. 성경의 빈약한 정보만으로는 예수님이 그녀를 왜 ‘개’로 호칭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간청한 게 전부인데, 여인은 황당하게도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녀가 이방인이라고 예수님이 차별대우를 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본문의 흐름을 보니 그녀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챈 것 같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나오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이집트 문명에서 나오라고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자기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요. 이 여인의 귀에는 새로운 북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북소리는 헬라문명에서 나오라는, 그 문명 안에서 그 문명에 꼬리치며 살지 말라는 하늘의 전언(傳言)입니다.

2014년은 갑오년이었습니다. ‘청마(靑馬)의 해’라고 해서, 푸른 말처럼 기세 좋게 시작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4ㆍ16을 당했습니다. 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는 갑오년의 가장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이와 연관된 시 중에 제일 충격적이었던 시가 곽재구 시인의 <반도의 자화상>입니다.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생각하면/두 발로 꼿꼿이 서서/자유와 정의와 노동의 참 해방을 부르짖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오천만 마리의 개가 아닌/오천만의 따뜻한 피를 지닌 인간으로 서서/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절규하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아들딸에게 물려줄 꽃 같은 대한민국”에 대한 꿈이 어느덧 “50층 펜트하우스에 살며 연봉을 수십 억 받는” 꿈으로 슬금슬금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시인은 토로합니다. “눈과 코와 귀를 지폐로 쑤셔 막고/바닷가재 식사를 하고 로열 발레를 보고 나스닥 시세를 점검하고/먼 나라 섬의 은행에 이름 없는 통장을 개설하고/그림 같은 이국에 별장 몇 채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개’로 변해갔답니다. 힘 있는 잘난 사람들의 말에 “살살 꼬리를 흔들고/최저임금이며 비정규직이며 전세금을 날린 이웃들의 절망과 슬픔에는 관심이 없고/오로지 내 땅값, 내 아파트값, 한 푼 더 준다는 노인 연금에 매달리는” 우리야말로 “잡종견”이라고, 시인은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곽재구 시인의 그 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진짜 개는/ 주인과 함께 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온갖 탐욕과 부조리와 헛된 명예를 거부하며/ 농장 안의 염소와 토끼/ 어린 닭들과/ 새로 피어날 아침의 나팔꽃을 위해/ 피침 흘리는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마치 멧돼지처럼 우리 새끼들을 잡아먹는 헬라의 물질문명에 맞서 싸우라는 위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에 ‘예’ 하였으니, 이 여인의 이후의 삶은 하나님이 펼치시는 새로운 구원 역사의 어머니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누구의 것입니까? 자본이든 권력이든 ‘이제 여기’의 삶에서 주인 노릇하는 것들은 죄다 가짜입니다. 참 주인은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 우리에게 매순간 하늘의 북소리를 들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 귀에 두 가지 북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세상나라의 북소리, 하늘나라의 북소리! 여러분은 어느 북소리의 장단에 춤을 추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