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습니다

새벽지기1 2021. 2. 12. 07:19

세상의 교회는 과연 구원의 방주인가? 교회에 등록하고 교인으로서 살아야만 구원이 보장되는 것일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 것일까? 자못 심각한 질문들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가나안 교인들’(교회를 떠난 교인들)의 숫자가, 많게는 무려 500만 명에서 적게는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등진 이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상실한 것일까요?

양희송 씨가 쓴 책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에는 한 ‘가나안 교인’과 인터뷰한 내용이 길게 적혀 있는데, 그 사람은 모태신앙으로서 대학생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에 웬만한 헌신자가 아니면 하지 않는 선교단체 간사를 7년 동안이나 한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떠나, 주일이면 혼자 조용한 커피숍에서 기도와 묵상과 QT 등 나름의 신앙생활을 하고 십일조 헌금은 후원단체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끝도 모를 싸움에 휘말려 소진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불안감 때문에 교회에 머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난 가나안 교인들은 평균 14.2년 정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교회를 옮겨 다니는 ‘교회 쇼핑족’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들을 단지 ‘잃어버린 양’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이 교회를 향해 던지고 있는 질문들에 함께 고민하며 올바른 답을 할 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신학자 로이지(Alfred Loisy 1857-1940)는 그의 저서 ‘복음과 교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러나 나중에 온 것은 교회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와 현재의 교회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그렇습니다. 교회에 등록했다고 구원이 확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구원의 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올바로 가르치고, 배우고, 닮아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목자가 자기 양의 젖과 털과 고기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회자들은 삯군이 아니라, 도적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 목회자를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말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갈 6:6)는 말씀을 들어, 목회자를 잘 섬기라는 말을 정당화하지만, 참 스승이라면 제자들의 변화와 성숙을 가장 좋은 선물로 여길 것입니다. ‘사람 의존증’에서 해방되십시오. 많은 교회가 구원의 방주역할을 상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안다’는 단어가 네 번에 걸쳐 반복됩니다. 헬라어 ‘기노코스’는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뜻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는 믿음이 무엇인지 가장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통전적입니다. 전체를 묶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야다’는 ‘사랑한다.’ ‘신뢰한다.’ ‘의지한다.’ ‘소망한다.’ 심지어는 ‘동침한다.’는 뜻도 있고,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도 ‘야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를 아시고 내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신앙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관계추구입니다. 이 관계에서 목회자나 사람들은 제외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 제사장이 있어야 하지만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하나님과 가장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의 뜻대로 신나게 살도록 도와주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도와주는 ‘영적 코치’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는 우리 삶에 하나님을 끼워 넣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하나님께서 도우라고 요구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우리 방식대로 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급히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로 작업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의 하루는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이 되면 끝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루는 우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태초의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했습니다. 인간들은 열심히 일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수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창조에 보탬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해를 끼쳤습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들은 우리방식대로 사느라 지치고, 낙담하고, 세상에 해를 끼치지만, 해가 지고 잠이 들면, 하나님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지친 우리들과 망가진 세상을 회복시키십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에는 언제나 자신의 판단이 옳은가 의심하는 ‘망설임’과 욕심을 채우려는 ‘서두름’이 공존하고, 초조함과 후회와 자책과 원망과 책임전가가 결과로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아침에 일어나 밤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헤아리고 그 일에 손을 보태는 사람들에게는 망설임도 서두름도 없습니다. 세상 풍파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기쁨과 나와 이웃의 생명이 풍성해지는 보람과 마침내 영원토록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교회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은혜와 진리로 사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