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새벽지기1 2021. 2. 15. 07:22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의 핵심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일까요? 대부분 그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기적을 기대하며 열심히 예수님을 믿었는데 아무 일도 없습니다. 어떨 때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신앙에 혼란이 생기고 회의가 들고 잡다한 비본질적인 질문들로 시간을 허비합니다. 기적이 곧 하나님의 영광일까요? 네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 중 지극히 작고 작은 편린에 불과합니다.

불치병이 낫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좋을까요?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고, 모두에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임한 기적으로 인해 교만해졌고, 기적을 바벨론 사신들에게 떠벌이자 하나님께서 떠나가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좋았을까요? 당시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이 나사로를 예수님과 함께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요 12:10) 또한 나사로는 그 이후 성경에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작은 증거일 수 있습니다. 혹시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도망만 다닌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는 다시 죽었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목적은, 나사로의 생명 연장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심화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2) 기적에 매달리면 생각은 단세포적으로 반응하여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책망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크고 작은 소망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뭔가를 열심히 행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력이 보상받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집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미(美)를 추구하였습니다. 빈궁과 질병도 무릅썼고, 자신이 추구하는 미를 그려내지 못하자 정신착란에 빠지고 자해까지 합니다. 그런 고흐가 자신의 그림들 중에 ‘미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 있었을까요? 몇몇 작품에 잠시 흡족했을지는 몰라도 분명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최고봉인가 싶지만 오르고 보면 ‘가야할 길’과 ‘올라야 할 봉우리’는 끝도 없이 뻗어있습니다. 그 길과 봉우리들을 발견하고, 생각에 잠기고, 다시 일어나 열심히 가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깊고 넓고 심오한 뭔가를 더 원하고, 갈망하고,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끝없이 갈망하는 그 마음을 솔로몬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이라 명명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주셨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훗날 이 땅에서의 여행이 끝나고,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왜 그리 하셨을까요? 우리가 이룬 것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자만하며 가는 길을 멈출까 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을 ‘순례자’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는 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힘들어지면 천천히 라도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을 누릴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가짜이거나 ‘천상행복의 그림자’들이고 세상의 악행들은 지옥에 대한 상징과 경고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보상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보상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부당한 보상’이 있습니다.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데 상대방의 미모나 돈과 지위를 보고 결혼하여 얻는 것은 부당한 보상입니다. 아부로 얻은 진급이나 속임수로 얻은 이익도 부당한 보상입니다. 이런 보상들은 마침내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세속적인 복을 바라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것은 부당한 보상을 바라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정당한 보상’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결혼은 정당한 보상입니다. 성실과 정직과 부지런함에 대한 보상은 돈과 명예입니다. 그런데 이 정당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보상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로 부당하지 않습니다. 공명정대하실 뿐만 아니라, 후하기까지 하십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더 남긴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3)라고 칭찬하시고 보상하셨습니다. ‘주인의 즐거움’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연약하고 얄팍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즐거움이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한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즐거움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세상의 영광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광을 따라가다 보면 생명과 존엄성은 잃어버리게 마련이고, 세상의 영광은 사람들을 교만하게, 거만하게, 자만하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즐거움에 ‘참예’하자.”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잠기고 그 일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길은, 그분을 경배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아무리 세상과 사람들이 악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보상과 그분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 가득한 그 곳, 천국에서 우리들은 최고의 환영과 영접과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들이 채워지고, 잘못된 것들이 교정되고, 쓸 데 없는 것들이 제거되어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전에 예배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