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가 뽑혀지고 있다.
한국에서 방송 일을 하는 미혼의 일본 여인이 정자를 받아 아이를 출산하였습니다. 이에 방송은 연일 소식을 전하고 있고, 사람들의 격려가 이어졌다는 소문입니다. 참으로 기괴한 일이지만 세상은 놀라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격려가 넘치고 있다고 방송합니다. 우리 시대의 방송과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이 받은 정자는 어떻게 구했는지? 누구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매우 윤리적인 문제가 많은 내용인데 아무런 논쟁도 없이 격려와 감사 인터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별일 아니듯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뿌리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세상이 우리 앞에 올지 두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기대하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요? 이렇게 근본부터 흔드는 근원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나라도 서구가 걸어갔던 중심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상황에 대한 진단을 차례대로 생각하고 그 대안을 고민하고자 합니다.
우선 진화론적 생각이 시대를 완벽하게 점령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점점 좋은 세상으로 진화될 것이라는 사상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기존의 생각을 흔들고 있습니다. 결혼은 남녀만이 하고, 아이는 결혼한 가정에서만 낳고, 가정은 부부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철 지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을 주었던 기존의 생각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는 철 지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변화의 길목에 기독교는 불필요한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한국적 상황에서 유교도 동일합니다)
둘째 인간이 신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진화론적 인간에 대한 이해는 신의 죽음을 가져오고 인간의 신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신의 보좌에 인간의 이성을 놓았던 프랑스 혁명 이후 인간은 더욱 가파르게 신의 자리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니체와 후계자들인 포스트모던 학자들의 역할은 인간의 가치를 한층 높였습니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성을 권력으로 보고, 억압에서의 자유를 주장하였습니다. 기독교적 가치를 해체하였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인간이 결정하면 진리가 되고 있습니다.
셋째 인간의 죄와 죄책에 대한 거부입니다.
인간이 신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는 시대에 죄와 죄의 책임의 문제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억압이 문제이지 자유가 문제가 아닙니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은 자연 가운데 선하게 태어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죄와 관계없는 존재로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죄의 문제는 현존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원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강조하는 기독교는 시대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죄책감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박정우는 죄책감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죄책감이 없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죄책감에서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습니다.
넷째 윤리적 기준을 상실하였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양심은 작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시대는 윤리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이념에 알맞게 다수의 견해가 곧 윤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기존의 기준이었던 가치를 권력과 억압으로 여기고 해체하였기 때문입니다. 결혼, 가정, 성, 진리등의 기준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선호하고 선택한 것이 곧 윤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자를 어디에서 구입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통로로 주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선택하고 행복하다면 모든 것이 용납이 됩니다. 절대적 윤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제 누구의 윤리인가만 남았습니다. 지독한 상대주의가 윤리의 왕좌에 앉아있습니다.
다섯째 사랑의 신학이 한몫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억압과 독재의 시대에는 정의의 하나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정의의 하나님 보다 사랑의 하나님이 더 강조됩니다. 이미 서구의 현대주의 신학이 가져온 열매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젊은 세대에 영향을 주고 있는 두 학자의 책을 통해서도 그 사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철학자인 월토스토프는 “정의와 평화가 입 맟춤 할 때까지”,“하나님의 정의”, “사랑과 정의”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베품과 용서”,“광장에서 기독교”,“행동하는 기독교”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책 제목에서도 어는 정도 느낄 수 있지만 생각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이긴다는 생각이 우리 시대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하여 꼿꼿한 자세를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혼자의 출산, 낙태, 동성혼에 대하여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로만 바라봅니다. 신학이 흔들리면 사회도 흔들립니다.
비혼자의 출산을 바라보면서 이제 가정의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시대를 봅니다. 성경의 세계관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미 성경에 대한 확고한 지지가 무너진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온 현실입니다.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를 붙잡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섯 가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관을 더욱 견고하게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성경적 세계관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넷째는 시대의 순응자가 아니라 저항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교회는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표지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터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를 붙잡는 일입니다. 작금의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성도들이 온 힘을 다하여 무너지는 시대를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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