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짊어진 십자가
(눅23:18-26)
◆본문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서론
-주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마가)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막14:50-54)“
3년 동안 동고 동락하던 제자들!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잡히자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
베드로도 예수를 <멀찍이> 따라갔으나 그 곳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다.
이 얼마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땀방울이 핏발울이 되도록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주님은 그렇게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셨다.
만약 내가 그 때 거기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고난 주간 셋째 날 나의 묵상이다.>
-주님!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습니까?-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27:27-31)“
옷을 벗기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희롱하며, 침 뱉고,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희롱하는 로마 병사들!
체포 되신 예수님께서 일개 병사들에게 그렇게 조롱 당하셨습니다.
주님!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조롱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이 모두가 나 때문에, 우리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것은 제가 어제와 오늘 아침에 단톡방에 올린 말씀 묵상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여러분은 이 고난 주간을 어떻게 보내시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고난 주간을 맞아 예수께서 사형언도를 받던 날의 상황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본문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왕 때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탁월한 책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제갈량이나 조선조 때 한명회 같은 인물입니다. 전쟁이나 나라의 큰일을 구상 할 때는 책사나 모사들이 있어서 그들의 지혜를 빌려 나라를 다스리거나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다윗왕 때에는 바로 아히도벨과 후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원래 다윗왕의 책사였으나 후에 반역하여 압살롬을 왕으로 세운 주역입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 후새라는 사람인데 그는 다윗왕의 충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윗왕께 충성을 다하는 신하였는데, 다윗왕을 위하여 압살롬에게 위장 투항하여 압살롬의 계략을 파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제 다윗왕이 최대 위기를 맞고 있었을 때 압살롬은 아히도벨과 후새를 부릅니다. 그리고 다윗왕을 제거할 두 책사의 계략을 묻습니다. 먼저 아히도벨이 책략을 제시합니다.
“지금 다윗왕과 군사들이 가장 지쳐 있을 때입니다. 쉴틈을 주지 말고 기습공격하면 전쟁을 종식 시킬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한 마디로 <기습전>을 제시합니다. 이어서 후새가 책략을 보고 합니다.
다윗왕은 지금 새끼 잃은 암곰처럼 독이 올라 있음으로 지금 치는 것은 불리합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왕께서 군사를 모아 전군의 선두에서서 <총공격>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전술이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삼하17:14)“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후반 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쳤다!-
하나님께서 압살롬의 분별력을 무력화 시키신 것입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채택되지 않자 이 전쟁이 패할 것을 알고 고향에 가서 자살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謀事在人 成事在天-
이 말의 잠언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여러분! 가나안을 정탐했던 12정탐꾼 이야기 아시지요? 40일간의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정탐꾼의 보고는 <여호수아와 갈렙>팀과 <나머지 10명>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먼저 갈렙의 보고는 이랬습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하지만 그와 함께 올라갔던 다른 사람들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정탐꾼들의 보고가 끝나자 예상했던 대로 백성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14:4)”
당황한 여호수아와 갈렙이 급히 나서 말려 보려 하지만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적 분별력의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수결의 원칙’의 함정입니다. ‘다수’의 말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는 22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어떤 죄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무리는 일제히 소리 질렀습니다.
“이 사람(예수)를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18절)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언도합니다. 백성의 영적 무지가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군중심리에 휘말리면 분별력을 잃기 쉽습니다.
하지만 군중의 소리가 항상 진리는 아닙니다. 또 군중의 외침이 반드시 하나님이 뜻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다수결’이 아니라 ‘하나님 독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세상의 광야를 살아갈 때 ‘군중의 소리’에 물론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수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재’를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재’는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영적 분별력을 지닌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둘째, 주님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도망가거나 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들을 비열한 제자들이라고 비난 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담해야 합니다. 아니 장담이라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의 제자는 무겁고 부담되는 십자가라고 마땅히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어떤 조롱과 멸시, 고난과 수치를 다 견디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마음과 충성을 다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참 제자의 삶은 어떤 희생도 각오한 생명을 건 결단하고 결단한 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 베드로는 마26:35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제자들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은 극심한 고통과 탈진으로 길거리에 쓰러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잡수신 것은 전날 성만찬에서 잡수신 빵 몇 조각뿐입니다.
그런데 지난밤에 주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체포 되신 후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차가운 공회당 뜰에서, 빌라도 법정과 헤롯궁전을 오가며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갈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로마 병정이 쓰러진 예수님을 일으키려고 채찍으로 때렸지만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이때 마침 그 곳을 지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죄인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실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마땅히 우리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몬이어야 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조용히 지켜보던 추장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외치더랍니다.
“예수님, 이제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십시오. 거기는 제가 박혀야 할 자리입니다.”
그 선교사님이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받고 함께 오열을 했다고 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시몬에게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땜분에 때로 모욕과 멸시와 수치를 겪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기꺼이 헌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일찍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불충분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오고 오는 세대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복음을 위하여 그때 그때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고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대학 때 복음을 믿는다는 이유로 부친께 학비가 끊기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지금부터 24년 전 캠퍼스 사역자로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재정적인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바
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아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셋째, 때로 원치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져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대장이 명령을 하달합니다.
“피아노 전공한 사병은 지금 당자 연병장으로 집합하라.”
그러자 피아노를 전공한 사병들 전공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소대장은 그들을 향해 명령합니다.
“지금 강당으로 가서 피아노를 옮긴다. 실시!”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지만 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을 살게 된다는 예화입니다.
바로 오늘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런 처지에 놓였습니다.
지금 주님은 극한 탈진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 로마 병정은 그 때 마침 그 곳을 지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짊어지고 가시던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구레네라는 곳은 아프리카 리비아에 있는 트리폴리라는 도시입니다.
시몬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약 1300Km 떨어진 구레네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가야할 곳을 향해 가던 중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27:32)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억지로’입니다.
갈 길도 바쁜 사람에게 사형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막15:21에 의하면 시몬에게는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그 과정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시몬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롬16:13에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합니다.
시몬의 가족이 초대 교회 때 믿음의 가정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일은 시몬에게 온 가정이 구원받는 은혜의 계기가 되지 안 았나 추측해 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변화를 보며 미국의 워런 위어스비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사람들을 구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상치 못한 상황과 험난한 상황 심지어 수치스런 상황까지도 사용하고 계신다.”
이런 비슷한 예는 또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숫가 살며 평생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산업사회도 아니고 그들이 갑자기 무슨 다른 일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께서 부르십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4:18-19)“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예기지 않은 일이 닥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억지로 진 십자가가 아니고 기꺼이 주님의 십자가를 진다면 더욱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시몬에게 놀라운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하물며 자원하여 복음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특별한 은혜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주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와 복이 함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단순계산으로 1990년 전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세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첫째,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둘째, 주님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
▶셋째, 때로 원치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져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특히 세 번째 대지 ‘때로 원치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져야 할 때가 있다’에 주목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예기지 않은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 안에서 우연도 예기치 않은 일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만 있을 따름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줄 누가 알았으며,
에스더가 페르시아에 황후가 될 줄 누가 알았으며,
모르드개가 페르시아의 재상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의 부르심이든지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늘 은혜입니다.
그 부르심에 이렇게 기꺼이 참여한 여러분들을 다시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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