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롬9:14-24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새벽지기1 2019. 3. 19. 07:20

9

10

11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

왜 이스라엘을 유기하셨는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바울의 고통과 근심(1-3)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4-13)

하나님의 주권(예정)(11-13)

하나님이 주권(토기장이 비유)

(14-24)

하나님의 주권과 이방인(25-29)

행위로 의를 구했기 때문!

(9:30-33)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

(10:1-5)

선지자들을 거부했기 때문!

(16-21)

이스라엘의 남은자의 구원(1-10)

이방인의 구원과 자만경고(11-24)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14)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약속(25-32)

이스라엘 유기의 기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25)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의 변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9:14-24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본문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해석과 설명


바울은 앞 단락(4-13)에서 아브라함이 혈통으로 났다고 해서 무조건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택하신 자들만이 진정한 약속의 자녀이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바울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감을 가져왔고, 이에 대해 바울은 본문에서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서 하나는 택하시고 하나는 거부하신 일이 인간적 측면에서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으므로 불공평하다고 항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자의적인 선택이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공평함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택한 것이나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행동 혹은 이를 결정하신 하나님이 속성에는 불의(, 아디카아)’라는 표현을 적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5)

이는 출33:19이 인용으로 바울은 이제 논의를 전환하여 모세와 연관된 이스라엘의 선택을 언급하고 있다. 아브라함(7)에 이어 모세를 등장시킨 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효과적인 논증을 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 후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그 증표로 보여 달라고 요구한데 대한 응답의 말씀이다. 즉 모세의 기도(32:32)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신 배경과 관련이 있다. 한편, 여기서 불쌍히긍휼히는 각각 슬픔과 비참함을 외적(긍휼히), 내적(불쌍히)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나가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은혜가 아니고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

여기서 원하는 자달음박질하는 자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간구했던 모세를 지칭한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32:31-32)

아울러 롬9:1-3의 바울의 기도 역시 그 모세의 기도를 답습한 바울 자신의 동족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이 새 번역 성경에는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것하나님의 긍휼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하나님의 주권)는 것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이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선택을 이룬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가 하나님의 주권은 유기에도 적용됨을 보여 준다. 븍 바울은 그 표본으로서 모세의 상대자였던 애굽의 바로를 들고 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본 절은 출9:16의 인용으로 바울은 1인칭 능동태로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을 강조한 표현이다. 바울이 사용한 이 세웠으니라는 동사는 역사의 무대에 배우를 출연시키듯이 하나님이 바로를 선정해 세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인간들이 항변하지 못할 근거가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은 선택 뿐 아니라, 유기를 통해서도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영광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한편, ‘’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앙켈레널리 공포하다는 뜻을 가진다. 실제로 출애굽 역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18)

그런즉

6-17절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서 보여 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언급과 실레를 본절에서 결론적으로 언급함을 보여주는 접속사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본절은 출애굽기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구절이다.(7:3, 9:12, 14:4)

바울은 8절에서 육신의 자녀하나님의 자녀간의 대조로 이삭과 이스마엘의 선택과 유기를 예로 든데 이어, 13절에서는 야곱을 사랑하심에서 비롯된 선택과 에서의 미워하심에서 비롯된 유기를 종결짓고, 또 다시 본절에서는 이스라엘과 모세를 긍휼히 여기신 선택과 바로를 강퍅하게 하신 유기를 대조하며 논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여기서 들어나는 바울이 핵심적 논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바로의 죄를 그대로 내어 버려두사 유기되도록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19)

본 절을 공동번역으로 옮기면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뜻이다.

본 절은 지금까지(6-18)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절대적 주권성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제 독자들의 마음속에 제기 될 만한 의문을 스스로 제시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여기서 이 사람아는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호격이다. 그리고 감히(, 메눈게)’반대로라는 뜻이며, 힐문하느뇨?’는 헬라어 안타포크라노메노스반대하여 말하다또는 되받아 말하다는 뜻으로 앞의 감히(반대로)’와 더불어 19절의 빈정거리는 듯한 질문에 대해 단호한 반박의 뜻을 담고 있다. ‘감히 하나님께 반박하느냐?’ 그런 뜻이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침묵해야 할 까닭을 인간이 바로 피조물이라는 사실로 입증하고 있다.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지혜롭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알리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과 항변할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1)

여기서 진흙 한 덩어리는 본래 가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처럼 가치 없는 것일지라도 토기장이의 손에 의해 빚어진다면 가치 있는 그릇이 되듯이 전적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에 의해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토기장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기본적인 그릇의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며,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다.

한편 만드는는 헬라어 포이에사이만드는 권한이 전적으로 토기장이, 즉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강조한 표현으로, 이스라엘의 회심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본 절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강조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지금까지 바울이 일관되게 논의한 중심 사상인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에 보다 방점을 둔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예컨대 바로와 같이 패역한 자에게 대하여 참으신 것은 마지막 순간에 그의 진노를 나타내심으로 그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23)

본절은 22-24절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우선 긍휼의 그릇’(23) 진노의 그릇(22)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문맥을 볼 때, ‘진노의 그릇’(22)은 완고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긍휼의 그릇’(23)은 구원으로 초대 받은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을 말한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풍요함을 알고자이방인 중에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받았다 할찌라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한편, ‘’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긍휼의 그릇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

여기서 이 그릇은 우리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바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긍휼의 그릇)를 말한다. 바울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구원은 혈통이 아니라 신적 주권과 선택이며, 이방인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라!

바울이 본문을 기록한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구원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주권과 선택이며,

이방인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코 유대인을 버렸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도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1)

여기서 진흙 한 덩어리는 본래 가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처럼 가치 없는 것일지라도 토기장이의 손에 의해 가치 있는 그릇이 되듯이

전적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에 의해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 될 수 있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토기를 만드는 흙으로 선택되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가 토기장이의 손에 지어진 피조물(그릇) 이라는 사실이 초점이다.

이는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볼 때 부당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일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은 피조물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온전히 순복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