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내게 소망이 있습니다.(예레미야애가 3:17~23)

새벽지기1 2019. 1. 8. 07:50

예레미야 선지자가 처했던 형편은 결코 소망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절망적이었고, 예레미야에게도 절망의 순간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게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나라와 민족에게도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쉐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실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몸이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듯이 살아있는 사람은 예외 없이 아주 조금이라도 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망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입니다.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고, 늘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절망입니다. 이것을 ‘연약함의 절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둘째,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절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시고 절대자이시며 우리가 의존해야 되는 하나님께 반항하며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죄 때문에 경험하는 절망입니다. 이것을 ‘반항의 절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절망하고,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우리는 늘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절망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절망을 뛰어넘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끊임없는 산소가 공급되어야 하듯이 우리 영혼에도 끊임없는 소망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돈키호테는 “살아있는 한 소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정반대가 더 정확한 진리입니다. “소망이 있는 한 살아있습니다.”  

미국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두 개의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몸집이 비슷한 쥐 한 마리씩을 넣었습니다. 한쪽 물통에는 뚜껑이 닫혀있었고, 다른 한쪽 물통에는 뚜껑이 열려있었습니다. 물통에 빠진 쥐는 본능적으로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뚜껑이 닫혀있는 물통에 빠진 쥐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자 쉽게 포기했습니다. 4분 만에 바닥에 가라앉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뚜껑이 열려 있는 물통에 빠진 쥐는 36시간이나 쉬지 않고 헤엄쳐 실험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었습니다. 동일한 건강상태의 쥐였습니다. 뚜껑이 닫혀있는 물통과 뚜껑이 열려 있는 물통의 차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4분이 못되어 죽었고, 한 마리는 36시간이나 살아있었습니다. 쥐의 소망이 36시간을 버티게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은 소망을 가진 자와 절망 속에 머물러있는 자가 어떤 차이로 변화될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고난을 받았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낙심하였고, 방황하였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예레미야가 발견한 소망 
 
“그분이 내 심령에서 평안을 빼앗으셨으니 내가 행복을 잊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내 인내와 소망이 여호와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내 고난과 내 방황, 비통함과 쓰라림을 기억하소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내 영혼이 내 안에서 낙심하고 있습니다’”(17~20절). 
그들은 행복을 잊었고, 인내와 소망이 사라져버렸고, 방황했고, 비통함과 쓰라림 속에서 낙심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변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했던 예레미야가 21절에 가서는 “낙심 가운데 소망을 발견했다. 내게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반전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생각해 내기에 오히려 내게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애하심이 끝이 없는 것은 그분의 긍휼하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신실하심이 큽니다”(21~23절). 
예레미야가 절망 가운데서 발견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사라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떤 것을 해주실 것을 소망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대개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은 고난 속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절망으로 변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발견한 소망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소망,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소망, 고난 속에서 절망으로 빠지지 않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소망을 발견했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소망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참된 소망 ‘예수 그리스도’ 
 
참된 소망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소망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날 때 거짓된 위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달래주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잔혹하고 냉혹할 정도로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직면한 이후 소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면서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말씀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동시에 소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을 깨닫게 하면서 동시에 소망을 갖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최악의 모습을 지적받으면서 최선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절망의 근원인 죄를 해결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우리에게 소망의 삶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함께 기도하자고 할 때 잠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고통 받으실 때 모두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소망을 두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절망 속에서 잃어버린 영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만나셨을까요?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소망을 가로막습니까? 불행한 사건입니까? 전쟁의 위협입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절망케 해도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고백한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 생활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빕니다”(롬 15:13).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 가운데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을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이 땅의 죄에 묶이지 않게 하시고, 이 땅의 원리를 피할 수 있게 하시고, 이 땅의 죄악의 습관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 땅의 원리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고, 하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늘의 신비스러운 역사를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베드로서는 다른 단어로 이 소망을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미래시제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로부터 살리시어 산 소망을 얻게 하심으로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게 하셨습니다”(벧전 1:3~4). 
베드로는 ‘산 소망,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방황하는 나그네가 아니라 목적 있는 거룩한 순례자입니다. 순례자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목적지를 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영원히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유업이 예비 된 하늘의 순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끊어질지라도 끊어지지 않는 하늘의 유업이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살아있는 소망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흘러 넘쳐야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야지 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했을까요? 소망은 미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미래시제가 소망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인생은 소망이 가득합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온전하게  이룰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이 약속되어 있는데 그것은 소망으로 얻습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니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내게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진실을 외면하고 마취시키는 소망이 아닙니다. 

여러분, 진실을 통과하지 않은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악을 감추고, 덮어주고, 외면하고, 문제가 없다고 여겨주는 것은 죽은 소망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살아있는 소망은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소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변함없으시고, 신실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긍휼하신 분입니다. 살아있는 그분께 소망을 둘 때 우리의 소망이 살아있는 소망이 됩니다.        
흔히들 “고통 없이 얻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반대말도 진리인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고통을 견딜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얻을 것이 있는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 온전한 구원이 약속되어 있고, 하늘에 영원한 썩지 않는 유업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에게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