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이 잘못된 것일 때도 많습니다. 전도서에서는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법정에서 진실에 대한 침묵은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침묵한다면 큰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엘리사 시절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에 쳐들어왔을 때의 일입니다. 사마리아성이 완전히 포위당해서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아이를 잡아먹는 끔찍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 성문 앞에 살던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성에 있어도 죽을 것이 뻔한데 이렇게 죽을 바에야 아람 군대 진영에 가서 항복이라도 해보자. 만약 아람 군대가 항복을 받아주지 않더라도 성 안에서 끔찍하게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람 군대 진영으로 넘어갔습니다. 그곳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아람 군대 진영에는 아무도 없었고, 먹을 것, 입을 것, 금은보화를 버려두고 갔습니다. 나병 환자는 영문을 모른 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아람 군대 진영에 펼쳐진 먹을 것, 입을 것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 안에 있는 우리 동족들은 이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만 이 소식을 알고 있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
“그러다가 나병 환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하고 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잠자코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날이 밝을 때까지 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바로 가서 왕궁에 이 소식을 알리자’”(왕하 7:9).
동족들이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더 이상 굶주림과 두려움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상황을 알리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그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사마리아성에 가서 큰 소리로 알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그들이 침묵했다면 정말로 잘못한 것입니다. 모두에게 좋은 소식, 모두가 알아야 할 기쁜 소식이 있는데 먼저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병환자들이 느꼈던 마음과 태도가 있어야합니다.
동족들이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더 이상 굶주림과 두려움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상황을 알리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그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사마리아성에 가서 큰 소리로 알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그들이 침묵했다면 정말로 잘못한 것입니다. 모두에게 좋은 소식, 모두가 알아야 할 기쁜 소식이 있는데 먼저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병환자들이 느꼈던 마음과 태도가 있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나병 환자들과 같은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나병환자들이 고백했던 바로 그 고백입니다.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은 의무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부담감이 무엇입니까? 벌을 받을까 두려운 것보다 모두가 들어야 하는 소식, 모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소식, 그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때 오는 양심의 가책입니다.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복음에 대한 침묵은 진정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 이전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말씀을 전파하는 이들에게 있어야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나병환자들이 고백했던 바로 그 고백입니다.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은 의무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부담감이 무엇입니까? 벌을 받을까 두려운 것보다 모두가 들어야 하는 소식, 모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소식, 그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때 오는 양심의 가책입니다.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복음에 대한 침묵은 진정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 이전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말씀을 전파하는 이들에게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를
가끔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채워지지 않는 필요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프리카에 굶주린 영혼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필요를 알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는 것은 참된 선교로서 불충분합니다. 선교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행하신 일, 모든 사람을 위해 이루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위대한 일이고, 예수께서 이루신 일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기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포사이스(P. T. Forsyth)라는 분이 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선교사역들의 약점은 (우리가) 아직 해야 할 일이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신 일보다 더 크다는 생각을 무심코 드러낸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장 심각한 필요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보다는 못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너무나 위대하고, 크고 놀랍고, 기쁜 소식이기에 그 일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세상의 필요를 내가 도와야겠다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의 헌신인 것입니다.
포사이스(P. T. Forsyth)라는 분이 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선교사역들의 약점은 (우리가) 아직 해야 할 일이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신 일보다 더 크다는 생각을 무심코 드러낸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장 심각한 필요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보다는 못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너무나 위대하고, 크고 놀랍고, 기쁜 소식이기에 그 일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세상의 필요를 내가 도와야겠다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의 헌신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확신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룩한 부담감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했으니 의무적으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신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성령이 너희 안에 임하시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는 그 기쁘고 복된 일에 너희도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만난 결과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의 열매이며, 성령께서 임하신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표입니다. 논리적인 결과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그 영광스러움에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했으니 의무적으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신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성령이 너희 안에 임하시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는 그 기쁘고 복된 일에 너희도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만난 결과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의 열매이며, 성령께서 임하신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표입니다. 논리적인 결과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그 영광스러움에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확신이 있었습니다. 흘러넘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단순히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가운데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해 어떤 사람이 됐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살전 1:5).
‘확신’이라는 단어는 컵에 물이 흘러넘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확신이란 믿음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확신이 있을 때 그 믿음은 가둬둘 수 없습니다. 컵에 물이 흘러넘치는 상태가 확신입니다. 내 안에 확신이 있다면 그 믿음이 흘러넘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한 믿음이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주시는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확신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기에 성령의 바람이 우리 영혼 속에, 온누리교회 위에, 한국 교회 위에 흘러넘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단순히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가운데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해 어떤 사람이 됐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살전 1:5).
‘확신’이라는 단어는 컵에 물이 흘러넘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확신이란 믿음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확신이 있을 때 그 믿음은 가둬둘 수 없습니다. 컵에 물이 흘러넘치는 상태가 확신입니다. 내 안에 확신이 있다면 그 믿음이 흘러넘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한 믿음이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주시는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확신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기에 성령의 바람이 우리 영혼 속에, 온누리교회 위에, 한국 교회 위에 흘러넘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 확신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말씀이 디모데후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유언 같은 편지입니다. A.D. 67년 경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됩니다. 순교 직전입니다.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감옥 속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에게는 이 확신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위해 나를 선포자와 사도와 선생으로 세우셨다. 이로 인해 내가 다시 이러한 고난을 당하지만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믿고 있는 분을 알기 때문이며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딤후 1:11~12).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죽어갈 이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후회가 없습니다. 원망도 없습니다. 불평도 없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오직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확신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이 확신을 아들처럼 생각했던 디모데에게 엄중한 명령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위해 나를 선포자와 사도와 선생으로 세우셨다. 이로 인해 내가 다시 이러한 고난을 당하지만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믿고 있는 분을 알기 때문이며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딤후 1:11~12).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죽어갈 이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후회가 없습니다. 원망도 없습니다. 불평도 없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오직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확신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이 확신을 아들처럼 생각했던 디모데에게 엄중한 명령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말씀 전파와 임박한 심판
“너는 말씀을 전파하여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 끝까지 오래 참고 가르치며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여라”(2절).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를 강조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절박하게 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끈기 있게 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 전파는 절박한 일이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조급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잡아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망하고, 어떤 이들은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적절한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책망하셨지만 죄에 빠진 이들은 때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변화시켰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를 강조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절박하게 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끈기 있게 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 전파는 절박한 일이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조급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잡아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망하고, 어떤 이들은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적절한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책망하셨지만 죄에 빠진 이들은 때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변화시켰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말씀 전파를 엄숙히 명령합니까? 그 이유는 심판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실 것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내가 엄숙히 명령한다”(1절).
말씀 전파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임박한 심판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분의 다시 오심입니다. 심판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한대로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실 것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내가 엄숙히 명령한다”(1절).
말씀 전파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임박한 심판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분의 다시 오심입니다. 심판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한대로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나쁜 소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처한 절망적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이란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심판으로부터의 구원, 심판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심판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때 네로 황제의 핍박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비교적 로마 황제와 관리들이 사도 바울의 재판을 공정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네로 황제시절에는 유대 지도자들과 완전히 결탁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풀려날 수 있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상황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선고를 내리는지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려워했던 것은 네로의 핍박에 의한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속으로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나를 사형에 처할 수는 있으나 다가오는 심판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생존하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있어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생명의 삶에서는 단 1초도 단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시대를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네로 황제에게 핍박을 받아 복음 증거에 방해가 되고 있지만 장차 오는 시대에는 더욱 복음을 훼방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임박하면 사람들은 더욱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으며, 교회를 핍박할 것을 알았습니다.
“때가 오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욕심을 따라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하는 스승들을 많이 모아들일 것이다. 또 그들은 진리에서 돌이켜 허황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딤후 4:3~4).
이것이 오늘 이 시대 분위기 아닙니까?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이념에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바른 교훈을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특징들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이란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심판으로부터의 구원, 심판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심판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때 네로 황제의 핍박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비교적 로마 황제와 관리들이 사도 바울의 재판을 공정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네로 황제시절에는 유대 지도자들과 완전히 결탁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풀려날 수 있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상황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선고를 내리는지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려워했던 것은 네로의 핍박에 의한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속으로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나를 사형에 처할 수는 있으나 다가오는 심판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생존하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있어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생명의 삶에서는 단 1초도 단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시대를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네로 황제에게 핍박을 받아 복음 증거에 방해가 되고 있지만 장차 오는 시대에는 더욱 복음을 훼방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임박하면 사람들은 더욱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으며, 교회를 핍박할 것을 알았습니다.
“때가 오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욕심을 따라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하는 스승들을 많이 모아들일 것이다. 또 그들은 진리에서 돌이켜 허황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딤후 4:3~4).
이것이 오늘 이 시대 분위기 아닙니까?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이념에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바른 교훈을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특징들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다섯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많은 적그리스도가 출현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얼마나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존재합니까? 둘째, 전쟁 소식과 소문이 도처에 등장합니다. 셋째, 기근과 지진이 일어납니다. 과거 10년 동안 일어난 지진의 빈도가 그 10년 이전 100년 동안 일어났던 지진보다 훨씬 많습니다. 넷째,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납니다. 중국, 인도 등 곳곳에서 믿는 자들이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다섯 째 사랑이 식어집니다. 가족 간에도 사랑이 식어집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복음을 거부할 것입니다. 갈수록 기독교에 대해 반항적이며, 바른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힘은 이념이나 나라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특징입니다.
인도에서 40년 동안 선교사역을 마치고 1974년 영국으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선교사에게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내용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종말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공포분위기를 조정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예언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종말의 때에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영원한 소망의 길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마리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데 두려움과 공포 속에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 같은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야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영혼들은 동일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많은 적그리스도가 출현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얼마나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존재합니까? 둘째, 전쟁 소식과 소문이 도처에 등장합니다. 셋째, 기근과 지진이 일어납니다. 과거 10년 동안 일어난 지진의 빈도가 그 10년 이전 100년 동안 일어났던 지진보다 훨씬 많습니다. 넷째,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납니다. 중국, 인도 등 곳곳에서 믿는 자들이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다섯 째 사랑이 식어집니다. 가족 간에도 사랑이 식어집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복음을 거부할 것입니다. 갈수록 기독교에 대해 반항적이며, 바른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힘은 이념이나 나라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특징입니다.
인도에서 40년 동안 선교사역을 마치고 1974년 영국으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선교사에게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내용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종말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공포분위기를 조정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예언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종말의 때에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영원한 소망의 길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마리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데 두려움과 공포 속에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 같은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야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영혼들은 동일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생명이 없는 죽음의 땅에 생명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심판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구원을 전해주는 말씀 전파의 부르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증인됨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 마지막 심판을 앞둔 종말의 때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할 일입니다. 기쁨의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말씀을 전파하라”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신
이 엄숙한 명령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온 세상에 주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우리 모두 합력하여 참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전파하라”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신
이 엄숙한 명령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온 세상에 주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우리 모두 합력하여 참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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