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5-30)
▶본문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해석과 설명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25절)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다.
이 말씀은 약간 조롱의 의미가 있다.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종교 문제에 있어서 지혜 있는 자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학식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 날 모든 지적 교만한 자들을 지칭하는 말씀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25절)
어린아이의 특징은 수수함이다.
그 어떤 사상이나 지식에 물들여져 있지 않다.
이들은 스스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
마침 어린아이가 부모님께 의존적인 것처럼 말이다.
겸손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는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26절)
원문에는 ‘옳소이다’가 ‘옳소이다. 아버지여!’로 ‘호격’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2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전달 방법을 말한다.
즉, 스스로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숨겨져 있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에게 복음이 들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
여기서 ‘내 아버지’란 말씀 속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는 것처럼 역으로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시기 때문에 또한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를 나타내실 수 있으신다.
따라서 아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즉, 아버지와 그의 계시를 아는 것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누구일까?
당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힘겹고 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맥상 이것은 종교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엄격한 의무와 규칙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이 초청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라
25-27절 사이에 나타난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일체성 주장에 근거를 둔 절대적인 권위의 초청이다.
즉, 죄와 율법의 짐에 지쳐있는 사람들의 영혼에게 쉼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29절)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의 헬라철학적 개념은 심오하다.
이는 신체의 중심적인 기관이나 감정과 사고의 중심 부분을 가리킨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의 ‘마음’의 개념은 히브리적 관념에 영향을 받고 있다.
즉, ‘가슴’ 또는 신체 활력의 중심지, 감정의 중심지, 여러 이성적인 역할을 하는 사고와 이해의 중심지,
의도하고 계획하는 의지의 중심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적 심성의 중심지를 가리킨다.
이런 개념으로 볼 때 본 구절의 ‘마음’은 전인격적인 성향의 핵심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온유’라는 단어는 단순히 성격 자체의 유순함이나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맥상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집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가혹하고 엄한 노역 감독원의 모습이 아닌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지닌 ‘온유’와 ‘겸손’을 가지신 분이셨다.(사40:2이하, 사53:6).
또한, 예수님은 친히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유’와 ‘겸손’의 모습을 실증해 보이셨다.(빌2:3-6)
▶교훈과 적용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29-30절하)
여기서 ‘멍에(헬, 쥐고스)’는 문자적으로는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밭을 갈거나
짐수레를 끌도록 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무거운 틀을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져야 하는 어려운 고역이나
괴로움을 주는 부담거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당시 로마 군인들은 포로로 잡힌 노예들을 멍에에 씌워 압송시켰는데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멍에’는 ‘노예와 같은 예속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유대 문학에서의 ‘멍에’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스승(랍비)의 가르침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겁고도 많은 멍에를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 멍에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무겁고도 힘든 멍에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의 멍에’를 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멍에는 바리새인들의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배우라’는 말은 ‘내 제자가 되어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아마 우리 가운데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복음을 깨닫고 참 평안을 우리고 있는 성도!
하나는 참 복음을 깨닫고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세상의 짐 때문에 힘들고 고된 삶을 사는 성도!
그리고 아직도 참된 복음을 알지도 못한 채 교회만 다니는 사람.
오늘 본문은 마지막에 해당하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의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8-29)“ 아멘!
'좋은 말씀 > 리민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12:1-21) (0) | 2018.03.18 |
---|---|
하나님의 구원은 상황에 있지 않다.(삼상14:1-6) (0) | 2018.03.16 |
‘피리를 불어도 곡을 해도 반응이 없는 세대!(마11:16-24) (0) | 2018.03.06 |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15) (0) | 2018.03.05 |
전도자가 고난 중에 가져야 할 자세(마10:24-39) (0) | 2018.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