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70년 기한을 채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살피시고 복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게 하시고 신앙을 재정립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그대로 남은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70년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미 현실에 안주할 만큼 많은 것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힘든 생활을 해야 하는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남아 바사 제국에 속하게 된 유대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치 도살당하는 어린양과 같은 운명에 처한 유대인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사 제국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신 그 사랑의 이야기가 에스더서의 주제입니다.
에스더를 통해 유대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도 지금의 우리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고 그 원수를 무찌르시며, 우리를 험난한 길에서 건져내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온전할 때나, 낙심할 때도 하나님께서 늘 보살펴 주십니다. 본문 말씀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주제는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통해 유대 민족을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나아가니라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1절 말씀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과 함께 왕후 에스더가 베푸는 잔치에 나아갑니다. 어제도 왕은 하만과 함께 왕후의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왕은 기분 좋게 하만과 함께 왕후의 잔치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만은 새벽에 있었던 일 즉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모르드개가 도리어 존귀케 되고 그를 왕의 말에 태우고 이끌어야 했던 그 수치, 굴욕, 무안함 그리고 부인과 친구들의 예언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으로 잔치에 참여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보상 받게 돼 있습니다. 왕은 술을 마시며 말합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남자들은 왕이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잘 듣고 각자 아내에게 말해 보십시오. 물론 우리는 나눠줄 나라를 갖고 있지 않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해 준다면 아내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어쨌든 왕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왕후에게 주겠다고 공언합니다.
에스더서 3장 9절에 보면 유대 민족이라고 표기하지 않았지만, 은 1만 달란트에 한 민족을 모두 진멸할 것을 왕에게 허락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에스더는 왕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했을 때 매우 떨렸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명예, 부, 권력 등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초지일관 자기 민족의 생명을 구합니다. 에스더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왕에게 말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자신의 생명을 구하면서 동시에 자기 민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구하라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앞 절에서 이미 두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세 번 만에 왕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는 에스더
성경 말씀에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들어주겠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역대하서 1장 7절 이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마무리 되었을 때 솔로몬이 1,000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는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로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을 삼으셨사오니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로 치리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존영도 주리니 너의 전의 왕들이 이 같음이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쁘시겠습니까!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우리 아이가 생일인데, 제가 묻습니다. “생일 선물로 뭘 사줄까?” 그때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저는 아빠면 족해요”라고 말했다면 제가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에스더는 왕이 무엇이든 구하라고 했을 때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생명을 요구합니다. 그는 희생을 치르고, 용기를 갖고 자기 민족의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의 모습을 보면 한 분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모든 영광을 가지셨지만 그것을 모두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 같이 잠잠히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에스더만이 왕에게 간청할 수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간청하실 수 있습니다. 에스더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 같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것을 버리시고 낮아지셔서 우리의 영혼을 간구하십니다. 에스더가 당당히 죄를 밝힌 것 같이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의 쓴 뿌리를 밝히시고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더가 용기와 지혜를 갖고 왕 앞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주저하지 않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님들, 민족을 구한 에스더처럼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민족의 생명을 구한 에스더처럼,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속에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본문에서 발견하는 두 번째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5~7절 말씀을 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일러 가로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화를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왕이 화가 났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왕후 에스더를 누군가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후의 민족을 누군가 진멸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감히 어느 누가 이런 일을 계획하고 그 장본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때 에스더는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라고 일러 줍니다. 그 말을 들은 하만은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시는 하나님
모든 것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어둠 속에서 말한 것이 대낮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결국 하만이 두려워 떠는 것처럼, 모든 죄인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에스더는 담대하게 하만을 지적하고 왕은 그 말에 깜짝 놀랍니다. 왕은 하만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은 왕이 신뢰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최측근이 배반하여 왕비를 죽이려 하고, 나라에 큰 손해를 끼치려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왕은 화가 나서 왕궁 후원으로 나갑니다. 왜 왕은 후원으로 갔을까요?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왕은 화가 나서 후원으로 가서 도끼로 나무들을 찍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왕이 하만에게 어떤 형벌을 내려야 할지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만은 에스더에게 자신의 생명을 구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하만은 새벽에 모르드개의 일을 당했을 때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계획을 돌이키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 말씀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설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기회 주시기를 영원하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더 늦기 전에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분노했습니다. 비록 그 때가 늦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가장 정확한 때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사야서 43장 1~3절 말씀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통 받는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셨던 것처럼, 아하수에로 왕으로 하여금 모든 사실을 알게 하신 것처럼, 하만의 음모를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기억하시고 고통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장이 되시고,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있습니까? 풍랑이 치는 한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만의 범죄가 전부 드러나듯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지키십니다. 본문에서 발견하는 세 번째 주제는 모든 악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8~10절 말씀을 읽습니다.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의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가로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왕은 가장 믿었던 신복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음모를 꾸민 사실에 대해 마음에서 결정을 내리고 왕궁 후원에서 잔치 자리로 돌아옵니다. 왕은 하만이 에스더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왕후를 희롱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왕은 분노가 극에 달해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라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하만의 얼굴을 쌉니다. 얼굴을 싸는 행위는 정죄 받은 죄인이 빛을 볼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이 죽을 때 흰 천으로 얼굴을 덮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역사적으로, 왕실의 전통에서 왕의 왕후나 빈에게 신하들이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만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왕후를 붙잡고 자신의 목숨을 구합니다. 도리어 그 모습이 왕을 더욱 분노케 했습니다.
늦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라
에스더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를 통해 가족이나 친척들이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친구, 동료들이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주님께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정점은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이 연출되기 위해선 탕자의 회개를 전제 조건으로 합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주님께 돌아올 기회가 있을 때 속히 돌아오십시오. 9절 말씀에서 왕을 모신 내시 하르보나가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했던 장대가 하만의 집에 세워져 있다”고 아룁니다. 왕은 하르보나의 진언을 듣고 하만이 세운 장대에 그를 매답니다. 하만의 술수와 음모는 결국 자신에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죄악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만의 죄는 심판을 받고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시편 7편 15절 말씀처럼 사악한 자는 결국 자신이 판 웅덩이에 빠지고 맙니다. 죄악이 횡행하여 악인은 권세를 얻은 것 같지만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모든 손길들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죄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신 32: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끝까지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고 구원하십니다.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중재자로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 아버지 하나님!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아갔던 에스더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심과 같이
풍랑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악인이 심판받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죄로부터 떠나게 하시고 죄의 사슬을 끊게 하시며
구원의 보좌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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