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무덤에 묻히신 예수 그리스도

새벽지기1 2017. 11. 13. 06:5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몸에서 피와 물을 남김없이 쏟으시면서 모든 것들을 인류의 구원 사역에 내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인 것입니다.

 

분명히 죽으시고 장사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후에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정말로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채 잠시 기절하신 것도, 혼수상태에 빠지신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진짜로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도 진짜인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죽음을 ‘진짜’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바는 우리가 입으로 ‘아멘, 할렐루야’라고 말하지만 실제에서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나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정말 죽으셨던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으셨을 뿐 아니라 무덤에 장사까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구원의 비밀은 죽음에 있습니다. 다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죽지 않으려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덫에 걸리는 이유는 옛 사람을 죽이지 않은 채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자신이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인류의 죄를 용서받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저주, 질병, 죽음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뼈가 꺾이지 않은 예수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완전히 죽으셨던 사실을 여러 관점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31~33절 말씀입니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예비일이었고 다음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시체를 십자가에 남겨둔 채 안식일을 지내길 원치 않아 빌라도에게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시체를 치우려면 죽음이 확인돼야 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허락을 받아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꺾습니다. 십자가 처형에서 사람의 다리를 꺾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면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고 결국 죽게 됩니다. 하지만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일찍 죽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긴 나무 막대기를 갖고 다니면서 죄수의 정강이를 꺾어 최후로 죽음을 확인했습니다.유대인들의 요구로 군병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양편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의 다리부터 꺾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 했을 때, 이미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은 채 그대로 둡니다.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의 다리를 꺾어 재차 죽일 필요는 없던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한 엄청난 고통  

 

왜 예수님께서 일찍 숨을 거두셨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법의학자나 전문가들이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숨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고 은혜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일찍 운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죽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에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먹을 때 뼈를 꺾지 말고 먹으라는 뜻입니다. 민수기 9장 12절에도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사용할 어린양을 잡을 때 그 뼈를 꺾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시고, 온 인류의 죄를 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병들이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신 예수님의 뼈를 꺾지 않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는 일입니다.

 

34절 말씀을 봅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죽음을 확인하는 다른 방법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것입니다. 옆구리라 하면 범위가 넓은데 사람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마 심장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심장을 찌름으로써 확인 사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피는 성만찬을 의미하고 물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이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을 감당하시고 몸에서 피와 물을 모두 쏟으신 채 예상 시간보다 일찍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35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님 죽음의 현장 증인, 사도요한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이를 본 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 곧 사도 요한 자신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과정과 현장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아주 재미있는 두 제자가 나오는데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관찰력이 없고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면밀하게 살펴보지만, 베드로는 그냥 무덤 안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어머니에게 사도 요한을 가리켜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다’라고,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쏟아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리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요한은 모든 것들을 매우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36, 37절 말씀입니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 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뼈가 꺾이지 않은 것도, 옆구리를 창으로 찔린 것도 구약에서 어린양과 관련된 예언을 이루는 일입니다. 십자가 처형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은 어린양이 죽어가는 모습, 피와 물을 쏟으시는 모습 등에 대해 전율을 느낄 정도로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채 죽으신 때는 예비일이었고 곧 유월절이 되기 때문에 시체를 치워야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시신을 치웠느냐 하는 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굉장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치운 사람이 제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며 열심히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허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말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양도받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

 

예수님의 시신 처리를 위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남의 시선을 피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입니다. 먼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넘겨 달라고 말하고 허락을 받아 십자가에서 내립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와 눈물로 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당시 사회의 풍습대로 시신에 향품을 넣고 세마포로 쌉니다. 38절 말씀을 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4복음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해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요셉은 매우 중요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먼저 마가복음 15장 43절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존귀한 산헤드린 공회원(오늘날 국회의원)이었습니다. 당시에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려면 지적이고 존경을 받으며 사회적 배경을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에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자이고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0절에선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부유하며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그때까지 자신이 쌓아온 부와 명예와 권력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지만, 동시에 부와 명예와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믿었을 뿐,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라는 구절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바꿔 먹습니다. 그는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넘겨줄 것을 요구합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기득권층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누군가 예수님을 옹호한다면 그 사람은 유대인들의 집단에서 제외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가 두려움을 제거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잃게 되더라도 예수님을 붙잡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십자가의 능력을 덧입고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돌출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그 일은 매우 감동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용기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다만 성령님을 제한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믿음과 행동을 일치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쓸 향품을 가져온 니고데모   

 

또 한 사람으로 니고데모가 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고 지성인으로서 유대 상류층 사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낮이 아닌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전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궁금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갔습니다. 그 후로 성경에서 그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예수님의 시신 처리 과정에서 다시 나타납니다.저의 생각으로 니고데모는 계속 거듭남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시는 모습을 본 후 십자가의 능력이 그에게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해 캄캄한 밤을 이용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우유부단한 성격의 니고데모는 과감하게 옛 모습을 벗어던지고 대담하게 현장으로 뛰어듭니다.

 

39, 40절 말씀을 읽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당시는 예수님의 시신을 만지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취급 받던 상황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상관하지 않고 많은 돈을 들여 예수님의 시신에 넣을 향품들을 준비했습니다. 41, 42절 말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저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보면 얼마나 흥분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사건들 중에 두 사람의 행동이 가장 아름다운 감동을 안겨 줍니다. 그들은 늦게 발동이 걸렸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을 보고 결국 자신들의 인생관을 바꾸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십자가의 능력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붙잡은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로잡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세계에서 수면 위로 올라와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제자로 서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제자임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이 씻고 향품을 넣어 장사 지내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돼야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거듭나고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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