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새벽지기1 2017. 11. 10. 07:56


인류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하고 이해하기가 안 되며 이상한 재판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께 행한 재판입니다. 그 재판은 유대인들에 의한 종교 재판과 로마인들에 의한 정치 재판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 재판도 아니고 정치 재판도 아닌 매우 특이하고 불합리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의 28절 말씀부터 읽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이 짧은 한 구절 안에서 불법적인 정치 재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첫째,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려고 가야바 법정에서 빌라도 법정으로 옮겨지십니다. 한 법정에서 계속 재판을 받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재판장이 바뀌는 겁니다.

 

매우 특이하고 이상한 재판  

 

둘째, 예수님께서 새벽에 재판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새벽’이란 현대로 말하면 오전 3~6시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심야에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어떤 재판이기에 그토록 급하게 서둘렀을까요? 예수님께서 전시(戰時)에나 있을 법한 재판을 받으신 겁니다. 그것도 살인이나 강도 혹은 쿠데타와 같은 중죄도 아닌데, 충분한 검증 절차도 없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빌라도의 법정을 의미하는 ‘관정’에 유대인들은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인 빌라도의 법정에 들어가면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2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빌라도가 밖으로 나오자 유대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지릅니다. ‘저 사람은 행악 자이기에 우리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슨 악을 행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꼭두새벽에 데리고 왔느냐는 겁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느냐, 종교적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혐의는 달라지겠지만 빌라도가 봤을 때 예수님에게서 아무 혐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살인이나 강도 혹은 국가 전복 등을 꾀한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너희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자신들에게 그럴 권한이 없으니 로마법에 따라 사형시켜 달라는 겁니다. 30, 31절 말씀을 봅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여기서 유대인들의 속셈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법을 이용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편법을 쓰고 있습니다. 32절 말씀을 읽습니다.

 

성경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죽음 방법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의 행위는 성경 말씀의 예언을 이루는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압력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로마에서 파견 나온 유대 총독인데, 간교한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백분 활용해 여론 재판으로 몰아갑니다. 재판의 내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만약 당신이 이 재판을 하지 않거나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로마에 알릴 것이고, 그러면 당신의 정치 생명은 끝날 것이다’라며 무언의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약했던 빌라도는 인간적 양심과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고심합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재판을 시작하면서 형식적으로 심문합니다. 33, 34절 말씀을 봅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는 사태가 시끄러워지자 관정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불러들입니다. 관정 바깥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며 무심코 질문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의 응답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듭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것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며 도로 물으시는 겁니다. 빌라도는 귀찮은 생각으로 마음에도 없는 재판을 하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의 나라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인들과 그들의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다시 묻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36절 말씀이고,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총독이고 재판관인 빌라도는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유대의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빌라도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있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있음을 예수님을 통해 듣게 됩니다. 전쟁, 테러, 불법, 흥망성쇠가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전부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 나라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가 쓴 ‘신국론’(神國論)은 좋은 작품입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멸망당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또 하나의 나라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오늘날 인공위성, CNN 방송, 인터넷 등으로 지구상의 모든 소식들을 들을 수 있지만,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빌라도의 세계관에 이 세상의 나라가 있고, 예수님의 세계관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사람의 나라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의 나라에 대해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선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특징  

 

우리는 두 나라를 대비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나라들과 문명들이 일어섰다가 사라져갔는지 모릅니다. 물론 민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사람이 통치합니다. 옛날에 왕이 통치했고, 지금은 독재자나 영웅이 통치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제도에서 대통령, 수상, 권력 기관이 통치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쟁, 테러, 압제 등이 있습니다. 셋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자기 사랑입니다. 한 국가, 한 민족의 핵심 사상은 이기심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독도 문제로 일본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북한 등도 모두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 명분의 핵심에 이기적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넷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항상 권력 중심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이기게 돼 있는 게 이 세상 나라입니다. 또한 이 세상 나라는 정신적이지 않고 물질적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우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도 끝도 없고 멸망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이타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섬기는 자가 리더입니다. 넷째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영적입니다. 고로 두 나라의 세계는 너무나 다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또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내포돼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둘,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셋, 하나님의 통치 그 자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이미 임했으며 곧 완성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다양한 시제로 기록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동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 말씀에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기 때문에 귀신이 떠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또 누가복음 17장 20~21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시제와 공간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곧 천국의 도래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곧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셨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서 고민하고 갈등을 겪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환희와 감사와 찬송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셨지만,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이성이나 학습 등으로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7~8)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헷갈렸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 너무 다르고 상식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찬송가 495장을 좋아합니다. 3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가난, 질병, 실패, 억압 등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체에서 일을 하고 정당에도 가입해 활동을 하지만, 우리가 속한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37절 말씀을 읽습니다.

 

왕이신 예수님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말씀에 빌라도는 또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빌라도는 로마가 곧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그게 아닌 것입니다. 38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여기서 우리는 나라가 두 개이듯, 진리도 두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 나라에서 통용되는 진리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통용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빌라도는 이 세상 나라의 진리를 생각합니다. 같은 시간에 한 공간에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할수록 낭패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골치 아픈 논쟁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어떤 죄라도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찾아 봐도 죄가 없는 사람을 사형시켜야 하다니 얼마나 골치 아프겠습니까?

 

죄가 없으신 예수님

 

그 순간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전례를 생각해 냅니다. 그걸 기회로 예수님을 심하게 때리고 풀어주면 자신의 양심도 편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제안합니다. 그런데 모여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바라바는 강도입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사형당해 마땅한 흉악범입니다. 39, 40절 말씀을 봅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민중, 대중은 소중하지만 그와 반대로 가장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유대 군중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결국 강도 바라바는 풀려나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형을 당하시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의 재판을 통해 인간의 불법과 죄악된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그 와중에서도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설교를 들은 모든 분들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속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깊은 고백과 감사와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