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새벽지기1 2017. 8. 28. 10:36


지난 주 기윤실이 주최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컨퍼런스에서 보았던 르완다 내전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계속해서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짧은 내전으로 인하여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던,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참혹하고 슬픈 사건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살았던 투치족과 후치족의 내전은 친구를 죽이고 이웃을 죽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가지고 살고 있는 르완다를 보면서 마음이 내내 아팠습니다. 슬픔의 눈물이 흘렀고 가슴 속에서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더욱 가슴을 치게 하고 옷을 찢게 했던 것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교회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장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죽음을 피하려고 오는 후치족을 교회는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함께 다녔던 사람들도 용병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많이 있었지만 내전 당시에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나레이터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는 하였지만 하나님께로 데려가지 못하였다고 말입니다. 이 말이 내내 가슴속에서 울려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왔지만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의 삶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명령에 따라 동료 신자도 죽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마치 사사기 시대에 있었던 처절한 학살을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이들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르완다의 모습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분단의 현실로 인하여 참담한 상황을 언제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주는 의미가 상실 된다면, 르완다의 참상은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역감정과 정치 색깔 그리고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으로 심각한 난투 가운데 있습니다. 마치 휘발유통 옆에서 타고 있는 불과 같음을 봅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이러한 정치와 지역 색깔로 인하여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은 르완다 교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긴 했지만 하나님께로 나오지 않는다면, 지역과 정치 등 색깔 논쟁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를 치도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오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진리가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진리는 무서운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사랑으로 진리를 전할 것을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생명 없는 나무입니다. 당장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곧 썩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안착하여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위기의 순간에 비참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르완다의 일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르완다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시청 앞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각종 집회를 볼 때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외치는 구호와 현수막의 글을 볼 때면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생각합니다. 그 어떤 정치 구호보다 더욱 무서운 글이 교회의 집회에서 나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참으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겹치면서 르완다의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화해를 위한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후치족 출신의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투치족에 의하여 가족과 친족들이 24명이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복수의 칼을 갈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은 르완다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투치족 용병들을 찾아다니며 이들과 후치족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유족들과의 화해를 주선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죽인 이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생존자인 자매의 말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신실한 자매는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죽인 투치족 사람에게 나는 창조가 아니라 용서하라고 보냄 받은 자일 뿐이라고 하면서 용서하였습니다. 나레이터의 말처럼 사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더욱더 필요한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단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