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늪’에 빠져보신 적 있습니까?
상대방이 미심쩍은 행동을 합니다.
의심이 듭니다.
유심히 살피기 시작합니다.
하는 일마다 의심스럽습니다.
작은 의심들이 조합되어 확신으로 굳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 불신의 완강한 벽이 생깁니다.
가장 깊은 불신의 늪은 의부증이나 의처증일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의심이 시작되고,
그 의심을 풀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끝내 풀 수 없습니다.
이것의 무서운 점은,
불신의 늪에 빠진 두 사람은 아까운 생명과 시간을
생산적인 것은 눈곱만큼도 없는 일에 탕진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처증과 의부증을 대단히 심각한 정신병으로 간주합니다.
스티븐 코비가 좋은 책 한권을 썼습니다.
그 제목은 ‘신뢰의 속도’.
그는 그 책에서 공동체나 개인의 상호간 신뢰의 정도에 따라
치러야하는 대가와 돌아오는 이득을 수치로 나타냈습니다.
상호 신뢰가 전무한 경우, 80%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합니다.
이 때 하는 가장 잘 하는 말, “법대로 하라!”입니다.
신뢰가 매우 낮은 경우는 60%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합니다.
상대의 실수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반드시 공격 무기로 사용합니다.
고통스러운 감시와 통제가 공동체를 지배합니다.
신뢰가 낮은 경우는 40%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합니다.
상대편의 약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사람들을 적과 동지로 구분합니다.
신뢰에 문제가 있는 경우, 20%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합니다.
긴장된 대화가 오가고, 관계를 향상시키기 보다는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을 쏟습니다.
신뢰에 문제가 없는 경우, 본전입니다.
조직 내에 내편 네 편 가르는 정치가 거의 없습니다.
정중하고 건강한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신뢰가 눈에 보이는 경우, 20%의 이익이 더 늘어납니다.
창의력이 발휘되고,
상호간 활기찬 관계 속에서 서로의 강점을 찾고 그 활용을 극대화하는데 집중합니다.
최고 수준의 신뢰의 경우, 40% 이상의 이익이 늘어납니다.
배려와 사랑이 가득한 관계로 상대방의 일이 내 일이 되고,
창의성 외에도 즐거움과 놀랄만한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가정이 그런 곳이라면 지쳤다가도 가정에서 힘을 얻고,
직장이나 교회가 그런 곳이라면 빨리 가고 싶어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를 신뢰가 넘치는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 어떻게 만들까요?
신뢰의 기초는 두 가지, 성품과 역량입니다.
성품에는 성실성, 동기, 의도 등이 포함되고,
역량에는 능력, 기술, 성과 실적 등이 포함됩니다.
단순히 나쁜 의도가 없고 마음이 착하다고 해서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능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의심의 수렁, 불신의 늪에 빠져있는지 점검하고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동시에 좋은 성품과 능력을 갖춘 신뢰받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신뢰의 가장 큰 토대로 인도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이사야 28:14)
오늘의 말씀은 백성을 치리하는 지도자들에게 맞추어 있습니다.
신뢰의 시작은 리더로부터입니다.
또한 신뢰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만한 자’란 히브리어 ‘안쉐 라톤’, ‘비웃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 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찌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사 28:15)
누가 사망과 언약하고 거짓으로 피난처를 삼겠습니까?
이 말에는 비아냥이 담겨 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당시 북쪽에 있는 포악한 앗수르가 복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남왕국 유다를 위협합니다.
그러자 남왕국 유다는 얼른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목 놓아 외칩니다.
‘이집트는 결코 살 길이 아니고 사망이고 음부라, 오직 살길은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러자 그들이 말합니다.
“그래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다 어쩔테냐?”는 뜻입니다.
이들의 말은 단순히 하나님을 버리고 이집트에 붙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알면
이들의 생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겁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옳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볼래? 누구 말이 맞는지?”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버렸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께 치성을 드리는지 너도 알잖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야.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안 지켜 주실 것 같아?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면 다 죽는다고?
이 아이디어도 하나님께서 주신거야.
이집트와 쉽게 동맹을 맺은 것도 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거야.
그래 네 말대로 우리들은 죽을거다. 어쩔래.”
이런 뜻입니다.
동맹이 필요 없고 협상이 필요 없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정치도 해야 하고 외교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가 유다를 지켜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미국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능한 지도자나 정치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핵우산이나 기업이나 수출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중국과 러시아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고,
우파정권이 들어서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엎치락 뒷치락, 우왕좌왕, 갈팡질팡의 연속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즉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사 28:19)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더라도 진정한 살길이 아니라,
눈치 보느라 피곤이 더해지고 남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비단 국가 간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는 개인의 삶에서는 더욱 심합니다.
눈치 보며 줄타기 하는 인생은 자신도 신뢰할 수 없는 피곤한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는 것은 오직 두려움입니다.
김정식(가명) 씨는 전자회사의 실력 있는 엔지니어였지만
그가 다니는 회사는 재정악화로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경쟁회사 기술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신제품 자료를 넘겨주면 후하게 사례하겠다는 것입니다.
김정식 씨는 분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저는 양심을 파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파산하고 김정식 씨는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경쟁회사 사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장은 그에게 기술부장 직을 제의하였습니다.
어리둥절한 그에게 사장이 말했습니다.
“전 기술부장이 정년퇴임하며 특별히 당신을 추천하였습니다.
당신은 실력에다 정직함까지 겸비한 사람입니다."
정직과 성실에서 일관성이 있어도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내 뿌리를 두면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종교생활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 이기적이고 불의한 사람을
하나님은 거들떠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설사 하나님을 모르더라도 정직과 성실한 사람은 마침내 형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별명 중 하나는 ‘미쁘신 분’(히 11;11)입니다.
‘미쁘다’는 것은 ‘전적으로 신뢰할만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동기나 의도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유익을 눈곱만큼도 구하지 않으시는 철저히 이타적인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시 121:4)
하나님의 성실성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은 ‘하나님의 열심’(고후 11:2)으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살면서 우리들은 신뢰한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실망을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나는 신뢰할만한 존재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는 바로 내 자신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삼위일체 하나님만큼 신뢰할만한 존재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시험한 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처럼 인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시험과 유혹과 고난을,
그보다 더 심한 것들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온 몸으로 그것들을 이겨내셨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의지로 결심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너무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삶으로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왜? 내 인생을 예수님 위에 지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중략)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날아오는 축구공에 맞아 실명한 열 네 살의 소년,
설상가상으로 부모와 누나마저 잃고 맹인 소년 가장이 된 소년에게 세상은
“안마나 해라.” “소경이 무슨 공부냐?”
차디찬 편견의 말을 던졌습니다.
소년은 통곡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게 이토록 가혹하실까?”
몇날 며칠을 울며 기도하다가 문뜩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겸손히 낮아지는 법을 배우고 더 굳건한 삶을 살게 하시는구나.”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열여덟 살에 맹인학교 중등부 1학년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재 가진 능력에 감사하고
목표를 정하여 최대한 개발하자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공부하였습니다.
1972년 연세대학교 교육과를 거쳐 미국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백악관 국가 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위원장,
루스벨트 재단 고문이 됩니다.
바로 강영우 박사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사람들이 ‘장애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면
‘장애를 통해서’라고 정정해 줍니다.
‘장애를 통해서’ 자신만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는 모퉁이 돌이요 기초석이 되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기초로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삶을 현재에도 지어 가는 중입니다.
기독교의 최대 오해는 하나님을 잘 섬기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수많은 신들 중 가장 강한 신이 아니라, 전혀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차원이 다른 분은 다른 차원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고후 12:10)
당시 유다는 약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살길을 찾았습니다.
더 약해지고 마침내 망했습니다.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사 28:18)
정말 성경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나의 약함을 통하여”
현재 드러난 나의 약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걱정과 근심, 살길 모색 절망감 모두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십시오.
힘듭니다.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나가십시오. 지혜와 능력을 구하십시오.
영감으로 은혜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내가 가는 길을 열고 도와주십니다.
나의 약함이 곧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명하고
백 배의 결실을 누리고 베푸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말씀 > 신우인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지가 굳은 사람 (이사야 26:3~10) (0) | 2017.06.17 |
---|---|
그 날이 언제일까? (이사야 27:1~9) (0) | 2017.06.15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니 (이사야 29:13~20) (0) | 2017.06.11 |
하나님의 모성 (0) | 2017.05.09 |
그 땅이 번영할수록 (0) | 2017.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