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그룹의 왕회장 고 정주영씨의 별명은 ‘만수’입니다.
위기를 극복할 만 가지 수를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 그룹 사장으로 일할 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수 밑에서 이렇게 오래 동안 승승장구 하는 걸 보니 당신은 ‘구천수’는 되는가 봅니다.”
그러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구천 수는 만수를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단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두 양반 다 모두 남들보다 심지가 몇 배 단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인들이 말하는 심지가 굳은 사람은 초지일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점은 나름 훌륭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지난 번 한태영 박사의 강연에서 생각이 깊은 태음인은 대체로 심지가 굳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심지가 굳다는 것은 개인의 기질이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의 귀향”등 많은 명저를 남긴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 신부로서,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 글의 깊이가 대단하여,
심지가 누구보다도 견고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강연을 통해 실제 모습이나 말투를 보고 나서,
또 그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를 읽고 나서,
헨리 나우웬 신부는 대단히 심약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
심지가 대단히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헨리 나우웬의
울면서 늘어놓는 하소연을 밤새도록 들어야 했다고 전언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심하게 흔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특히 동성애성향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아냈던 사람입니다.
내 성품이나 체질이 어찌되었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 내 삶과 걱정거리들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맡겨도 되는 것일까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살벌한 경쟁의 시대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 나를 맡겨도 되는 것일까요?
요즈음 밑줄 그어가며 읽는 책이 한권 있습니다.
제러미 리프킨이 쓴 “공감의 시대”라는 책입니다.
그 책의 주제는 경쟁의 시대는 끝나고 공감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의 펠릭스 바르네켄 박사는
한 살이 조금 넘은 아기들 스물 네 명을 모아놓고
‘이타적 행동’에 대한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아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어른이 책을 쌓아 올리거나 수건을 빨래집게에 거는 등의 몇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가끔 그는 집게를 떨어뜨리거나 책들이 넘어져 쩔쩔 매는 모습을 연출하였습니다.
그 때 스물 네 명의 아기들 모두가 기어와 그가 집게나 책을 잡는 것을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집게를 던지거나 책을 쓰러뜨리면 아기들은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아기들은 어쩔 줄 모르고 난처해할 경우에만 도와주었습니다.
돕겠다고 뽈뽈뽈 기어서 몰려드는 스물 네 명의 아기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일순간 마음이 밝아집니다.
아기들의 이런 행동은 태어날 때부터 ‘이타적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몇 년 전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며 소유에 집착하여 서로 경쟁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투사로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소유에 집착하여 경쟁에 몰입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서로 도우며 살도록 창조되었음을 밝히는 수많은 실험과 연구와 저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현재와 미래를 생각합니다.
세상이 점점 더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업 시대는 가고 개성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삶의 패러다임을 빨리 바꿀수록 제대로 된 삶을 삽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
남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런 일을 찾아야 제대로 사는 세상이 왔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이 현실로 눈앞에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성공하는 마인드는 “자신의 개성을 살려 남을 돕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하나님께서 만드신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오래된 약속,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약속들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비한 야곱에게도 나타셨습니다.
땅과 자손과 복의 근원의 약속에다 반드시 생명을 지켜주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힘이 들 때마다 벧엘에서의 약속을 상기하였습니다.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부富는 하나님의 보너스였습니다.
17세 어린 소년 요셉도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 노예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 꿈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당시로서는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노예 생활을 견뎠습니다.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그에게 주어진 이집트의 총리직은 하나님의 보너스였습니다.
하나님께 의뢰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 하나님의 약속들을 내 것으로 삼고 그 약속을 믿고 견디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내 성품, 체질, 과거, 실패 그런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진짜로 믿고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인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끝까지 믿는 사람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을 ‘의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이 말씀은 정직하면 길이 열린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의인의 길은 정직하다는 것은 의인의 길은 ‘곧다’는 뜻입니다.
복잡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는 길은 단순합니다.
한국 신학대학교 김정준 박사님(1914-1981)은 목사요 구약의 권위자였습니다.
목사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 결핵에 걸려 마산 결핵 요양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환자들은 6급으로 구분했는데,
김정준 박사님은 가장 중증인 6급으로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온 나라가 너무 가난하여 병을 방치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언제 죽든 이제는 정말 온전히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박사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 변기통을 집어주거나 음식을 먹여 주는 일 밖에는 없는데
그런 일이라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의사들은 하루라도 더 살려면 힘을 아껴야 한다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3개월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병마저도 나아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많이 한 김정준 박사님을 살려주신 것일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준 박사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 요한만 빼고 모두 다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카이로스는 의미가 담긴 시간입니다.
성경에서는 크로노스는 세상의 시간, 카이로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과
김정준 박사님은 남아 있던 3개월의 세상 시간(코로노스의 시간)을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묵묵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의인의 길, 단순한 길을 갑니다.
‘고아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돌봐주는 부모가 떠나가셨습니다.
그러니 어린 몸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뭐든 의심부터 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집착합니다.
생각이 양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당연히 자아가 분열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고아의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늘보좌를 움직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벌을 받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더욱 열심히 종교생활에 매진합니다.
그런데도 소원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속았다고 결론 내립니다.
악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도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숨을 쉬며 지구 위에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운행하셔서 심은대로 거두는 정직한 곳인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것을 챙깁니다.
이것이 바로 불의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곧 하나님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고아가 됩니다.
그런데 육신의 부모가 돌아가시더라도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뢰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고아가 아닙니다.
주와 함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며,
의인의 첩경을 가는 사람이며, 팔자가 핀 사람이며, 심지가 견고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닙니다.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언제나 있습니다.
악을 이기고 물리치는 것이 성도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는 악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속사람을 보고 놀랍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그리고 장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 악을 이기지 못합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우리들의 목표는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내 중심이 주를 사모하는 것, 심지가 굳건해 지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무당에게 물어보십시오, 섬기는 귀신을 사모하는가? 사모하지 않습니다.
회교도들은 알라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려워할 뿐입니다.
불교도들도 부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을 세균만도 못한 우리들에게 사랑의 대상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중심에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나와 하나님 둘만이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중략)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은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경험은 유한한 인간이 맛보는 가장 위대한 기쁨의 순간이며,
어떤 시련, 희생, 고통도 그 기쁨을 손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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