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랑을 갈망하는 것만큼 자유를 갈망한다.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돈으로부터의 자유,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육체로부터의 자유,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등 수많은 자유를 갈망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근원적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했다(요8:34).
모든 인간은 죄의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외침이다.
옳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모든 세상살이는 죄의 종살이다.
사람이 자기 맘대로 죄를 짓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들 죄라고 하는 권세에 굴복하며 산다.
죄에 사로잡혀 살고, 죄에 이끌려 살고, 죄를 향해 살고, 죄를 내면화한 채 산다.
사람들이 그것을 시인하지는 않지만 모든 인간은 죄에 매여 살고 죄의 종노릇을 하며 산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자유 또한 죄로부터의 자유다.
사회적인 차원의 자유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죄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적 차원의 자유이기 때문에,
또 죄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만 참으로 인간일 수 있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기 원하셨다.
하여,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
옳다. 진리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사회적인 모든 매임으로부터 뿐 아니라 죄의 종살이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진리뿐이다.
진리만이,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떻게 인간을 그 지긋지긋한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할까?
죄의 권세를 짓밟아서일까?
죄의 아비인 사단을 추방해서일까?
죄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아서일까?
그렇지 않다. 죄를 보게 함으로써 죄로부터 해방시킨다.
사람이 죄의 종노릇을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를 본다고 해서 죄에서 해방되는 건 아니지만
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여, 진리이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죄를 보게 한다.
상식에 가려진 죄, 습성에 젖어든 죄, 어둠에 갇힌 죄를
드러내고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진리가 하는 첫 번째 일이다.
정말이다.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대면해야 한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죄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잔인함과 교묘함과
죄의 일상성을 깊이 대면하고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는 죄를 본다 해도 희미하게만 볼 뿐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지는 못하니까 진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한다.
그러면 진리이신 예수님은 인간 속에 들어와 온 세상에 가득한 죄와
자기 안에 득실거리는 죄의 실체를 비추어 보게 하신다.
자기 존재와 일상 속에 깊이 스며있는 죄의 실체를 비추어 보게 함으로써
죄를 경계하게 하고, 죄와 싸우게 한다.
죄에서 자유롭게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그렇게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은총이며 능력이다.
사람은 죄를 보게 할 때마다 정죄하고 억압한다. 심판하고 가둔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보게 할 때마다 죄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죄를 이기게 하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죄를 봐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 죄를 보면 죄가 사람을 살리지만
예수님을 통해 죄를 보지 않으면 죄가 사람을 죽인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옳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만이 참된 의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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