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 이 민수기13-14장은 구약에서 아주 유명한 12정탐꾼 이야기가 다뤄지는 장입니다.
12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이 아주 돋보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가나안 정탐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본론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첫째, 신앙은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본문에 의하면 가나안 정탐을 하나님께서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가나안 ‘정찰’을 허락하셨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나안 정찰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3장을 보면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민수기9장 21-23절에도
21.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22.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23.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굳이 가나안 정찰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신명기 신1:22-23입니다.
1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가나안을 정탐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이 아니라 군사전략적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였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창15:16)”
하나님은 언약대로 40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유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가나안에 입성시켜야 하셨습니다.
따라서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진하면 되는 것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가 돌아볼 것이 있습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에서와 팥죽으로 딜을 했습니다.
또 축복권을 빼앗기 위해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야곱이 장자가 된 것은 밭죽으로 장자권을 딜했기 때문입니까?
과연 야곱은 아버지에게 맛죽을 드렸기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야곱이 구속사적 장자가 된 것은 그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전략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나가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공간적으로 제한적인 지상에 있는 가나안을 향해 나갔지만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이라는 광야를 가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이라는 광야를 걸어가야 할 때 우리가 빠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만약 어느 장교가 전장에서 적진에 대한 정찰도 하지 않고
‘믿음으로 돌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은 아주 믿음이 큰 지휘관이라고 말하겠지만 분명 전투에서 100% 실패합니다.
모든 기독교 신자 지휘관이 꼭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은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믿음의 선택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이라는 광야를 걸어갈 때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정탐꾼 보내듯이 앞뒤 재거나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나안 정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둘째, 신앙은 <다수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40일간의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정탐꾼의 보고는 나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호수아와 갈렙과 나머지 10명의 의견이 갈린 것입니다.
먼저 갈렙의 보고는 이랬습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하지만 그와 함께 올라갔던 다른 사람들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12정탐꾼의 가나안 정탐을 한 것은 다녀와서 출전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군사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정탐꾼의 보고는 결코 하나님의 언약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12정탐꾼의 보고에 민감했습니다.
정탐꾼들이 보고가 끝나자 예상했던 대로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관적 보고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이미 멘붕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민14:1)”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14:4)”
당황한 여호수아와 갈렙이 급히 나섰습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민14:6-7)”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9)”
하지만 이미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14:10)”
3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다수결의 원칙’의 함정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은 민주주의 제도에서 중요한 원리 중 하나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은 세상에서는 상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수결 제도는 ‘옳은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합의한 원칙일 뿐입니다.
국회에서 다수결에 의해 통과된 법안들 중에 모두가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결의 원칙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수결의 원칙이 성경적일까요?
엄밀히 말해서 다수결의 원칙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독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주권’입니다.
성경에서 왕은 국민투표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직분도 목사가 공명정대하게 세우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명정대하지만 목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러 성도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제도가 ‘투표 제도’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교회의 투표제도는 예수님의 12번째 제자를 선택햇던 ‘제비뽑기’에 가깝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그동안 학생들에게 수없이 강조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삼상14:6)”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다수결이 아니라 ‘하나님 독재’입니다.
만약 정탐꾼 중 10명이 믿음의 보고를 했더라도 백성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세상의 광야를 살아갈 때
군중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수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재’를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재’는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셋째,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믿음의 <정면 돌파>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메시지 중에 전하면서 ‘긍정 마인드’를 이야기 합니다.
‘긍정 마인드’와 신앙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을까요?
성경 어디에 성도들이 긍정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4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민14:6-7)”
여러분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런 말들이 ‘긍정 마인드’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긍정 마인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긍정 마인드를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청소년 수련회에서 강사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우가 바로 ‘비전을 가지라’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지 내가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들이 자기 꿈을 꾸면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영적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향한 비전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느 날 한꺼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를 꿈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요셉에게 ‘해와 달과 별’의 비전을 보여주셨지만
정작 요셉은 그 뜻이 무엇인지 그 때는 잘 몰랐습니다.
요셉은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그러면 본문의 12정탐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암울한 현실 넘어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았던 여호수와와 갈렙만 가나안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나머지 정탐꾼은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14:22-23)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보이지 않는 실체의 가나안을 보았고 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거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안 믿고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믿음으로 정면 돌파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5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처한 현실은 참으로 암울합니다.
특히 요즘은 청년들이 가장 힘든 시기입니다.
하지만 암울한 현실 배후에 주님이 계심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신앙은 정탐이 아니라 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을 정탐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정복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시대 여호수아와 갈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먹이다!-
이렇게 선포하고 광야를 진군하는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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