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병수교수

고발 (딤전 5:19)

새벽지기1 2017. 2. 11. 22:11


지역교회는 단순히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또한 공간을 빌려쓰고 있는 교회가 건물 주인의 부도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독교에 적개심을 품을 때 교회는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물론 보통 지역교회의 위기는 안에서 생긴다. 무엇보다도 교인들이 이단에 말려드는 것은 지역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지 신자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면 교회에 당파가 만들어져 큰 소용돌이가 일게 된다. 성도들이 세상살이에 재미가 들어 신앙 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도 교회에서 작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문제는 대체로 목회자들에게서 발생하는 것 같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목회자로 말미암아 교회가 당하는 피해는 이미 익히 알려진 일이다. 게다가 목회자에게 이기심에 게으름과 나태까지 겹친다면 교회가 치러야 할 값은 매우 비싼 것이 된다. 목회자의 부도덕한 윤리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 윤리 문제 심각해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과 더불어 목회자에게 성경 실력과 신학이 부재하다는 것은 두고두고 말거리가 된다. 왜냐하면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 교회는 먹지 못해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되고 말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기름진 양식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껍질만 그럴싸한 방법론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거의 끝장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장로를 존경하라고 말하는 단락에서 “장로에 대한 고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여기에 담겨진 첫째 의미는 간단히 말해서 장로에 대한 고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앞으로 목회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내다보고 있다. 사도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에 한 줌이라도 착오가 있을까. 실제로 역사가 풀어져나가는 동안 교회에는 목회자들과 얽힌 비슷한 문제들이 되풀이되었다.

자신의 목숨 걸만큼 신중해야

목회자도 고발에 노출되어 있다. 목회자는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는 성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권위의 도전이라고 간주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성경을 몰라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더 세게 말해서 그런 목회자는 이미 성경의 엄중한 가르침을 떠난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장로에 대한 고발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로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는 둘째로 고발을 조심하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덧붙인 것이다. 이 표현은 무심코 들으면 안되고 조금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회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사람의 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잘못하면 목소리 큰 사람 한 명이 마구 지껄여댐으로써 교회가 소란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세”라는 숫자는 꼭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최소한의 복수를 의미한다. 목회자의 문제점을 들출 때는 적어도 성도들 사이에 서로 납득할만한 의견일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증인”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본래 어떤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책임이 있다는 아주 심각한 뜻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목회자에 대한 고발은 목회자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재미 삼아 만우절에 소방차를 부르는 장난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목회자가 자기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자신과 사소한 갈등이 있다고 해서 비판을 꾸며내는 것은 더욱 안될 일이다.


요즘처럼 이름을 감춘 채 인터넷에 마구잡이로 목회자를 공격하는 글을 만방에 공개하는 것은 부패한 인간의 절정적인 모습을 증명하는 것 밖에는 안 된다. 목회자를 비판하기 전에 그 내용이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 살펴보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진언할 수 있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를 파멸시키는 직격탄은 목회자에 대한 신망을 깎는 것이라는 사탄의 교활한 수법을 간파하지 못할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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