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약 4:2-3).
기도는 본질적으로 중보기도이다. 그것은 기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테필라’에 잘 드러나있다. 이 단어는 중재자로서 기도한다는 의미의 동사 ‘히트팔렐’(intercede, intervene, arbitrate)에서 파생되었다. 구약시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공식적으로 기도하는 일은 개인이 아니라 백성을 대신하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누군가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나눈 말씀 가운데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이 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대속적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뿐이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예수께서 대신하여 주신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중보기도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기도를 대신 중보 하신다는 것은 기도 내용이 그분의 뜻에 합한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응답받는 기도의 최우선 조건은 하나님 뜻대로 구하는 것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약 4:2-3). 그렇다면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도의 본질이 그러하듯이, 자신을 위한 것보다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우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교훈은 언제나 중보기도와 관련되어 있다.
(1) 주기도문은 여섯 가지의 기도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자신의 삶을 위한 기도(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우선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한 중보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보다 우선적으로 구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해석의 방향이 있겠지만,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남을 위한 기도 곧 중보의 기도로 요약할 수 있다.
(3)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리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7-12) 여기에서 기도에 관한 교훈의 결론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도의 목적이 남을 대접하려는 것에 두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곧 기도의 목적은 남을 위한 것이다.
(4) 누가복음 9:9-13은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비유인데, 밤중에 자기를 찾아온 벗을 위하여 이웃집에 가서 떡 세 덩이를 구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이웃은 밤이 너무 깊고 문은 닫히고 아이들과 함께 침실에 들었기 때문에 요청하는 떡을 내어 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간청함을 인하여 떡 덩이를 내어준다. 여기에서 '간청함'에 사용된 헬라어 ‘아나데이아’는 '부끄럽지 않은 당당함'(shamelessness)이라는 뜻이다. 비유 속의 주인공이 이웃집 사람을 향하여 부끄럽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구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배고픈 벗을 위한 중보기도이었기 때문이다.
(5) 마가의 다락방 기도는 이 땅에 교회시대를 연 위대한 기도회였다. 사도행전 1:14에 의하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마음을 같이할 수 있는 근본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각자 자신의 개별적인 문제를 모두 내려놓고 전체 공동체를 향하여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게 한 것은 120명이 하나가 되어 드렸던 중보기도였다.
우리 모두는 기도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곧 자신의 욕심이나 한계를 벗어나 중보기도의 중요성과 우선성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 모두 개인위주의 좁은 신앙을 벗어나 공동체중심의 열린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출처] 기도의 본질인 중보기도|작성자 viva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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