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고난 주간을 보내며

새벽지기1 2016. 10. 7. 07:34


지금은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음미하며 동참하는 주간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기간은 심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부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부담, 결코 대면하고 싶지 않은 고난과 죽음을 응시해야 한다는 부담, 일상의 기쁨을 누리면 안 될 것 같은 부담, 평상시 즐기던 것들을 끊어야 한다는 부담 등 여러 형태의 부담에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다. 또 주님의 고난에 열심히 동참하고는 있지만 내적인 충만감보다는 뭔가가 겉돌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할 수도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그 배경은 놀랍게도 고난 주간의 핵심 이슈가 고난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이 빠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야말로 고난 주간의 중심 사건이다. 하지만 고난이 고난 주간의 핵심 이슈가 되고, 고난에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이 빠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고난을 미화하거나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것 또한 본말(本末)을 전도(顚倒)하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고난은 단지 고난이 아니라 지고지순한 사랑이며 심오한 은총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탄생과 삶 전체가 사랑이요 은총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사랑의 절정이며 은총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오직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질고를 지셨고, 하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서만 가없는 은총을 베푸셨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단지 수난일뿐이라면 굳이 기억하고 음미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인류 역사 전체가 온통 수난 덩어리인데, 고난 없는 인생이 없는데,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인도의 싯다르타도 예수님 못지않은 고난을 당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기억하고 음미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음미하는 것은 역사의 숱한 고난과는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지고지순한 사랑 때문에 겪은 수난이고, 가없는 은총에 이끌린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고, 세상의 어둠을 치유하기 위한 대속의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렇다. 예수님은 단지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한 고난을 당하셨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발견해야 하는 최상의 진실은 고난이 아니다. 고난을 넘어 지고지순한 사랑, 심오한 은총을 보아야 한다.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랑과 은총을 보아야 한다. 만일 지고지순한 사랑과 심오한 은총을 보지 못한다면 고난 주간에 행하는 모든 행위는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고난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한 채 겉만 맴도는 겉치레가 되고 말 것이다.

 

고난 주간은 고난을 재체험하거나 고난에 몰입하는 기간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삶의 중심에 초대함으로써 세상 어디에서도, 세상 누구에게서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완전한 사랑을 재체험하는 기간이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서 세상을 향해 베푸신 최상의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고 음미하는 가운데, 다시금 그분의 품으로 깊이 들어가는 은총의 기간이다. 

 

고난 주간을 보내는 모든 교우들에게 이런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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