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삶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생활’(生活)은 말뜻 그대로 ‘살아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에서부터 일상적인 몸의 활동을 총칭한다. 사실 생활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활동이 아니다. 동물도 먹고 사는 활동을 하고, 식물도 자기 방식대로 먹고 사는 활동을 한다. 모든 생명은 제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생활한다.
반면, ‘삶’은 먹고 살기 위한 활동을 넘어선다. 삶이 생활에 토대를 내리고는 있지만 생활이 곧 삶은 아니다. 삶은 생활에 담겨 있는 속뜻을 헤아리고 해석할 때 열린다. 생활을 찬찬히 읽을 때 열린다. 생활 속에 담겨 있는 의미와 가치를 읽을 때, 생활이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고 생활하는 자의 내면과 통합될 때 비로소 삶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쉽게 말하자. 생활은 물리적인 몸(뇌의 신경정신 활동도 포함)의 활동이고, 삶은 전인적인 존재와 상응하는 활동이다. 생활은 육체와 정신의 기능적 활동이고, 삶은 육체와 정신의 기능적 활동 위에 마음과 영의 성찰적 활동이 통합된 것이다. 생활은 활동이고 삶은 읽음이다. 생활은 기능이고 삶은 예술이다. 삶은 생활의 영혼이다.
그러므로 삶의 지평은 넓고 깊을수록 좋다. 삶의 지평이 넓고 깊을수록 세상과 생활을 해석하는 지평도 넓고 깊어지며, 세상과 생활을 해석하는 지평이 넓고 깊을수록 삶의 지평 또한 넓고 깊어진다. 하지만 생활은 다르다. 생활의 지평은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좋다. 생활과 삶을 잘 관찰해보라. 생활이 복잡해지고 바빠지면 이상하게도 삶이 뒤틀리고 왜소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반면에 생활이 소박하고 단순해지면 신기하게도 삶이 살아나고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묘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역설이다. 생활이 삶을 풍성하게도 하지만 생활이 삶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경우도 많다는 것, 생활과 삶이 서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함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삶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설이다.
허나 어인 일인지 영리하기 그지없는 현대인은 아직도 삶이 아닌 생활로만 치닫고 있다. 성과로 평가받는 냉엄한 현실, 세계를 상대로 불꽃 튀는 경쟁을 해야 하는 버거운 현실을 핑계하면서 생활을 성찰할 여유도 없이 기능적인 생활에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근대(modern)의 문법이 낳은 필연이다. 알다시피 근대는 이성과 개인을 찬란하게 복권시켰고, 복권된 이성과 개인은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 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은 자아라는 동굴에 갇히게 되었고, 공동체는 개인으로 파편화되었으며, 생활은 기능화의 길로 추락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현실을 일찍이 간파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이성과 개인의 왕권이 사실은 허상이라는 것, 세계와 삶은 한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오래 전부터 탈근대(post modern)를 외쳐왔다. 하지만 생활에 바쁜 사람들은 여전히 근대의 문법에 갇혀 있고, 길들어 있고, 자아의 성을 높이 쌓기에 여념이 없다. 생활에 짓눌린 삶이 흐느적거리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으면서도. 근대의 문법에 갇힌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제는 생활에서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아니, 생활로 추락한 삶을 복권시켜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생활이 삶으로 승화할 수 있을까? 길은 가까이에 있다. 몸과 마음을 멈추면 된다. 이성의 소리 대신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 된다. 이성의 외침을 능가하는 침묵의 소리를 들으면 된다. 생활로만 내달리지 않고 생활을 읽으면 된다. 삶을 위해 생활을 최대한 단순하고 소박하게 줄이는 중대 결단을 하면 된다. 생활이 작고 단순해질수록 삶의 지평은 넓어지고 깊어지니까.
꼭 기억하자. 생활은 활동이고 삶은 읽음이다. 생활은 기능이고 삶은 예술이다. 인간은 생활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삶을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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