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애통과 온유 (마 5:4-5)

새벽지기1 2016. 8. 2. 07:54


1.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다.


세상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애통일 것이다.

세상은 이것을 피하고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일들을 서슴치 않는다.(향락산업의 번창)

그러나 복음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

(눅6: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의 웃음과 유쾌함과 행복을 정죄하고 있다.

(교인들의 가장된 행복과 온유의 문제)

하지만 이 말씀은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과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 애통은 어떤 사람의 죽음 때문에 애통하는 것과는 다르다.

괴롭고 슬픈 일이 많아서 애통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애통이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나 사건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복이 있는 애통은 영적 의미의 애통이다.

심령의 가난이 금전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임을 보았다.

이 애통도 이 세상에서의 일상적인 삶에서 느끼는 고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팔복은 모두 영적 상태와 영적 자세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위로 받는 사람은 영적으로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함을 생각하고,

그분이 명하시는 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의 무능과 절망을 보게 된다.

내가 나의 이러한 영적인 상태를 볼 때 이것이 나를 애통하게 한다.


영적 생활을 한 성자들은 항상 자기 검토를 하며 살 것을 권장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는가? 나는 무엇을 말했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했는가?’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그들은 말해 준다.

우리가 마땅히 해서는 안될 일을 생각하고 했음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기독교인이라면, 그 행동과 생각에 대해 슬픔과 고통으로 애통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7장은 바울이 이와 같은 애통의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자기 속에 선을 원하면서도 선을 행하는 것은 없는 것을 보았다.

자기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 것을 보았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자기를 사로잡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애통해 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죄성을 보고 이러한 바울을 체험을 통과하시기 바란다.

그 애통의 끝에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것이다.

그 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상태 때문에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다가 오시고 성령은 위로해 주신다.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위로를 받으며 행복하게 된다.

슬픔의 애통이 없이는 기쁨도 없다.

통회하고 겸손한 영혼에게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왜 위로와 기쁨이 없는가? 참으로 나의 영적 상태에 대해 애통함이 없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애통의 체험이 없는 교인들이 너무 많아 문제이다.)

참된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속에서도 같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 생에서 삶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온 세상이 불건전하고 불행한 상태에 있음을 보고,

이 모든 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이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주님이 애통하신 것도 그래서였다.

그가 ‘슬픔을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신’ 까닭도 죄와 죄의 결과 때문이었다.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고, 삶을 망쳐 놓고,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라고 하는 무섭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보셨다. 주님은 이 때문에 우셨다.

주님은 심령으로 애통해 하셨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고 애통하셨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고 죄를 짓는 것을 보고 우셨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시며 말씀하셨다.

(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우리는 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것 때문에 애통해야 한다.

주님이 이 일로 인하여 애통하신 것처럼 그를 참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동일한 이유로 애통해야 하는 것이다.

죄와 세상의 비참 때문에 애통하는 기독교인에게는 즉각적인 위로가 있고,

복된 소망의 위로가 있고, 장차 올 영광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애통하더라도 동시에 그 앞에 있는 소망 때문에 행복한다.

기독교인에게는 궁극적인 영원한 소망이 있다.

우리는 저 영원한 상태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슬픔과 탄식은 다시 없을 것이며,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며,

영원한 빛 속에서 영원히 그의 빛을 누릴 것이며,

순수하고 온전한 기쁨과 축복과 영광을 체험할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힘과 능력과 공격적인 도전으로 세상을 정복할려고 한다.

예수님의 방법은 온유함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물질적 군사적 정복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도 유대인들과 같은 정복관을 갖고 있어서 문제이다.

거대한 조직과 세력이 있어야 세상과 죄와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정치권력에 줄을 대고 경제세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과 힘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관과 복음관이 어떻든 연합해서 큰 세력을 만들어야

힘이 있어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의 힘있는 세력과 협력해야 세계를 복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힘이 아니라 온유해야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신다.

조직과 세력과 능력과 제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성경 전체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수를 늘리시지 않고 계속 줄이셨다.(32천명에서 만명에서 300명으로)

이것이 영적인 방법이다.(‘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할까 함이니라’)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다고 했다(삼상14:6).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군대의 갑옷과 칼이 아니라 손에 익은 작은 물맷돌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강국인 애굽을 의지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다.


온유한 사람의 실예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놀라운 온유의 사람은 성경의 가장 위대한 신사, 아브라함이다.

롯이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게 하고 그는 아무 불평이나 원망도 하지 않았다.

모세의 온유를 본다. 그는 땅위의 모든 사람보다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궁과 그 낙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고 비하하는 온유를 보였다.

다윗의 경우, 사울의 부당하고 억울한 살인기도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온유를 보여준다.

스데반의 온유를 보라.

바울을 보라. 선교하며 그 많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신서에서 그의 온유를 본다.


최고의 온유의 실예는 우리 주님이시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박해와 경멸과 야유와 조롱을 참으신 것에서 주님의 온유를 본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셨다.

원수들에 대한 태도,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복종에서 주님의 온유를 본다.

그는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온유이다. 참된 겸손이다.

온유란 무엇인가?

생래적 자질이 아니다. 생래적으로 온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태만하고 무기력하고 안이한 사람들일 뿐이다. 무골호인일 뿐이다.

그들은 조금도 온유하지 않는다.

온유는 맘에 들고 친절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생물학적인 것으로서 동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나 고양이가 싹싹하다고 해서 성질이 좋다고 해서 온유가 아니다.

(강자들의 권력의 횡포 앞에 순한 어린 양처럼, 길들여진 노예처럼, 비참하게 굴종하는 것이 온유가 아니다. 노예에서 자유케 하려고 십자가의 피로 자유를 주셨다.)

온유는 인격이나 인물됨의 연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유는 타협정신이나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얻는 평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온유는 위대한 능력과 함께 할 수 있다. 온유는 큰 권세와 능력과 함께할 수 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진리의 위대한 수호자들이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굳게 믿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다.

순교자들은 온유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단코 약하지는 않았다.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온유한 사랍들이었다.

이 고상한 자질, 모든 자질 중 가장 숭고한 자질을

동물적인, 육체적인, 생래적인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온유는 내적 정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온유는 무자비한 일격을 당하고서도 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참는다거나 견딘다는 느낌을 조금도 갖지 않는 상태에까지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다.

자기의 죄성을 보고 애통해 하지 않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다.

심령의 가난과 애통을 통해서 나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될 때에만 온유할 수 있다.

(가난한 영, 애통의 영이 되지 않고서, 생략하고서, 온유를 가장하는 것은 위선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참된 온유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방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온유의 본질이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서 나타나야 한다.

온유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도 인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유는 배울 자세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안배우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온유는 항상 배우려는 영을 의미한다.

온유는 우리 자신, 모든 것, 권리, 앞날의 모두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원수갚는 것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주신다.

온유한 사람이 결국은 세상을 정복하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비천하게 살 줄도 부요하게 살 줄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어 땅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온유는 우리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성품이 아니다.

속세를 떠나 중이 된 가련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온유해 보려고 애를 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다 천성으로는 온유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온유는 성령이 그 열매로 만드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온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기독교인은 모두 온유하도록 작정되어 있다.

온유는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다.

온유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산상수훈을 자주 대해야 하며, 온유에 대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성령의 실예들을 보고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들에 비해서 우리의 온유가 부족하고 훨씬 미치지 못함을 부끄럽게 고백해야 한다.

그런 다음 문제의 원인이 되는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 자신을 더욱 비우고 그 죄성을 애통해 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 온유의 열매를 맺어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