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구원(혹은 용서)의 확신 / 존 오웬(John Owen)

새벽지기1 2016. 7. 31. 08:18


구원 (혹은 용서)의 확신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죄로 인해 혼동에 빠진 영혼이 하나님 안에 있는 용서를 발견하는 과정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발견하는가? (시편 130) 아들의 피로 마련하신 죄 사함을 믿음으로 발견하며, 죄 사함을 받은 영혼은 예배와 순종을 하게 된다. 용서를 발견하기 전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창 3:10) 아담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자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범한 후에 두려움에 빠졌다. 아직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이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 가인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다. (창 4:16) 어리석은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숨을 수가 없다. (시 139:7-10)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 33:14) 죄의 책망과 질책은 있었으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나님을 소멸하시는 불로 인식하게 된다. 죄에 대한 압박은 커지고 용서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블레셋은 공격하려고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오지 않고 있을 때의 사울의 심령과 같은 것이다.

 

죄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은 신비적인 것이며, 거룩한 것이며, 한편으로 드문 (rare) 경우이다.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 까지 이른다. 가인과 삽비라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의 생각은 비고 만다.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 안에 있다. (엡 3:8, 9) 그러나 무지와 어두움으로 인하여 발견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그 본성상 용서를 알지 못한다. (롬 2:14, 15)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은 뗄 수 없는 쌍둥이와 같다. (히 10:1, 2)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을 비추어 주는 빛과 같다. 이것 역시 죄 용서함이 없다. (갈 3:10, 12)
죄 용서의 복음이 사람들에게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혹은 어리석어 보인다. (고전 1:18)

 

죄 용서함에 대한 잘못된 확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체험하였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체험들로 인한 거짓 확신들과 용서에 대한 헛된 거짓 확실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림자와 구름을 잡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 거룩, 순결, 엄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이 없다.(시 50:21) 사람들의 자신의 죄에 대해 심각성이 없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 (계명, 죄, 심판, 용서) 문제될 것이 거의 없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고, 죄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며, 용서는 단지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과 순결함에 대해서 모르는 자는 죄와 죄 성에 대해서 모르는 자이며, 용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자이다. 

 

복음이 일반적으로 외쳐지며, 어느 정도 교리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용서의 준비가 되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죄에 대한 용서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죄에 대한 용서를 믿음으로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 대한 질책으로 인하여 심령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때 마다 나는 용서함 받았다, 혹은 구원 받았다라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주거나 심리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설득에 불과하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견해(opinion)에 불과하다. 거짓 평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죄의 용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성령의 더 깊은 죄의 질책과 책망이 있어서, 결국 자기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기까지 부르짖고 찾아야 한다. 이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주시게 되며, (갈 1:16) 이 빛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원리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구절을 남용한다. 그러나 같은 요한 일서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함이지, 우리로 마음껏 죄를 지어도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자신의 죄를 보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로 부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공경함이 없다. 자신의 육신적 만족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계명을 지키거나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갈 마음도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거나 용서하여 주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요 5:14, 8:11, 참고, 겔 37:23) 

그리스도의 용서함을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시편 116:1, 5-7절에 의하면 용서함 받은 자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죄의 용서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죄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싸우는 심각성이 없다. 오히려 그 영혼은 죄를 짓는 것에 용기를 가지고 있다. 죄에 대해서 물타기를 하는 영혼이다. 유다서 1:4 에 의하면 경건하지 못한 자이며, 은혜 아래에서 죄를 짓는 방탕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남용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알면서 죄에 방임하고,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로마서 6:1, 2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용서에 대한 믿음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로 죄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주는 능력이 된다. 용서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복음적 순종 가운데 살게 만든다. (딛 2:11, 12)

 

용서에 대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에 평안함이 없다. 물론 일시적으로 기쁨이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인 것은 아니다. 잘못된 근거에서 스스로의 확신은 잘못된 목적을 낳게 된다. 그것의 뿌리는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은 결국 교만하게 된다

 

복음의 용서에 대한 진정한 성격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을 하는 것이며, 그의 거룩하심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의 공의에 도전을 하는 것이며, 그가 부과하신 멍에를 거부하고 내어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로 자신에게 오도록 제안하시고 격려 하시는 것이다. 죄의 용서함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은 자신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출 34:6, 7; 시 9:10) 죄인들로 하나님에게 나아오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사 1:10)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요한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요일 4:8)

죄인들로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나아오게 하는 일은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다. (느 9:17; 미 7:18; 호 11:9)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는 복음의 용서와 관련하여 몇 가지가 있다. 
아들을 보내셨다. (롬 3:25; 사 53:11)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는 죄인들로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주셨다. 
그의 피 안에 있는 용서의 약속은 믿음으로 우리가 호소 할 수 있다. (고후 1:20)
주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 (골 3:13)
성령에 의해서 적용된다. (골 2:13)
믿음의 눈은 실제적 용서를 보게 한다. (사 44:22)
그래서 우리로 완전하게 (fully)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한다. (삼하 23:5)

 

용서의 발견

용서의 발견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다. (고전 2:9-10; 롬 1:17)
이것은 매우 깊고, 놀라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발견하는 자들은 놀라워하고, 감사한다. (엡 1:19; 엡 3:19)그러나, 용서의 확신을 못 가지는 경우들이 있다 (행 13:38, 39; 욜 2:13, 14) 이러한 경우 복음적 회개가 일어나도록 촉구하고 있다. 확신을 얻게 하기 위한 지침들은 다음과 같다.
1) 죄로부터 평안해지고자 하는 자신들의 노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삼하 15:25, 26)
2) 기다려야 한다. (애 3:26)
3) 기다리되 은혜의 수단 가운데 있어야 한다.

 

특별한 용서의 확신을 얻게 된다.
영적으로 깊은 황폐의 상태에서 용서함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된다. (갈 2:20, 딤후 4:8, 롬 8:38, 39)
구원의 확신을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히 10:22, 3:14)
믿음의 성질 때문이기도 하다. (신 4:4; 수 23:8; 행 11:23)
이것은 성령의 인침, 증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인 것보다 더 충만한 성령의 교통으로 인한 열매이다. (롬 5:1-5)

 

용서의 확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효과들

1)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결심 (요 15:4) 어려움과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자 하는 심령이 일어난다. (시 73:28, 2, 14절 참조, 요 6:66-68)
2)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게 된다. (사 28:16) 내가 서두르지 않는다 (사 9:22)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으로 얼마나 기다렸는가?
3) 압력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출함을 받고 위로를 받게 된다. (잠 25:25; 사 33:17)

 

확신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삶

1) 이기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주요한 목적이다. (롬 4:20) 하나님께서 용서를 제공하시는 목적은 사람들로 그의 은혜로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엡 1:6)
2) 인내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기다린다. 
3) 염려와 불안에서부터 벗어나서 확신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의무

1)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 6:12)
2) 우리의 신실성의 표식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3) 용서함 받은 것으로부터 강력한 동기를 요구한다. (엡 4:32)
4) 구약에서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명기된 것이다. 
5)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서 용서 받는 조건은 아니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다는 것은 우리가 용서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이다. (마 6:14, 15
6) 자기 부정,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버리는 것과 같이 복음 속에 있는 의무이다.
7)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이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 인해 나타나야 하는 덕목이다)(엡 4:24)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